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고래 Oct 22. 2017

영화 <유리정원>

그 동굴은 왜 공포스러운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앞서 선보였던, 신수원 감독의 새 작품 <유리정원>이 오는 2017년 10월 25일 개봉하며 대중들 앞에 선보인다. 감독의 전작 <명왕성>(2012)과 <마돈나>(2014)는 모두 이른바 ‘문제작’들이다. 독자 또는 관객으로 하여금 한 번 보고 지나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이 보여준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그 안에 담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신수원의 이런 경향은 <유리정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신수원 감독의 이번 작품도 다시 한 번 유럽 등의 국제무대를 겨냥하게 될 모양이다.


 일단 간단하게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영화 <유리정원>은 기본적으로 두 인물, 생명공학연구자 ‘재연’(문근영 분)과 소설가 ‘지훈’(김태훈 분)의 이야기가 덩굴처럼 엮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재연은 식물의 엽록체에서 추출한 유전자를 동물세포와 융합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 ‘정교수’(서태화 분)와 연구소 후배 ‘수희’(박지수 분)에게 연구내용을 표절(또는 절도)당하게 된다. 이후 정교수와 수희가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사랑까지도 박탈당한 재연은, 살고 있던 옥탑방을 떠나 어린 시절 살던 숲의 유리정원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연구를 지속한다. 한편 소설가 ‘지훈’은 첫 소설 이후 몇 년째 작품을 내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 문단권력을 쥐고 있는 기성작가의 모욕에 분노하여 ‘그러는 너의 작품은 표절한 것 아니냐’고 고함을 지르게 되고, 실질적으로 소설가로서의 입지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이후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재연이 살던 옥탑방이다. 그는 재연이 남긴 낙서와 흔적들에서 영감을 받아, 인터넷에 소설 ‘유리정원’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나무, 멈춤의 움직임과 침묵의 소리

 영화 <유리정원>에는 커다란 나무를 프레임의 중심에 두고, 그것을 응시하는 장면이 주기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의 정물(靜物)을 응시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들은 사실 이야기의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제시됨으로써 독자 또는 관객은 분명 무엇인가 의미심장한 것이 감춰져 있다고 느끼게 된다.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오즈 야스지로의 정물화면에서 일상적으로는 지각할 수 없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인가 멈춰있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장면은 외형적으로 사진과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사진과는 다른 영화만의 특징이 발견된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그 장면에서, 독자 또는 관객은 시간의 존재를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 장면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독자 또는 관객에게 제시되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 장면을 영화 <유리정원>의 중심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신수원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나무가 침묵하며, 동시에 ‘움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자 또는 관객은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정중동(靜中動), 멈춤 안에 생명이 숨어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이 전환되는 공간, 숲

 영화 <유리정원>은 두 개의 공간으로 분할된다. 도시와 숲 말이다.

도시는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들의 공간이다. 대학교와 연구소, 출판사와 서점 등이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독자 또는 관객들의 일상적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은 부단하게 움직이는 공간이다. 그런데 영화 <유리정원>은 이곳을 표절과 부도덕한 욕망, 이른바 죄악으로 가득 찬 이미지로 도시를 시각화한다.


 반면 도시를 떠난 재연이 안착한 숲은 초록 액체가 흐르는 나무들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재연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유리정원’ 역시 그녀의 열두 살 어린 시절이었던 과거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멈춰있는 공간이다. 이곳은 순수의 공간이며 침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시와 숲을 가로지르는 경계 또는 연결하는 간극으로서 강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있다.


 이러한 공간분할은 도시와 숲을, 각각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으로 치환시킬 수 있게 만들어준다. 도시는 인간의 의식에 해당하며,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을 빌자면 상징계에 속한다. 언어적 질서의 영역이며, (비유적인) 아버지의 법과 규칙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다.


 이와 대비되는 숲은 무의식에 속한다. 은폐되어 있고,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의식 너머의 실재계이다. 생명의 비밀이 감춰져 있는 공간이지만, 그것을 엿보게 되면 죽음을 맞이하는 심연이기도 하다. 줄곧 숲을 흐르는 자욱한 안개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곳은 이른바 꿈의 세계이기도 하다. 동시에 유리정원과 숲은 재연의 어린 시절 기억 속 형상이라는 점에서 상상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은 썩은 강물과 죽어가는 나무, 깨지고 부서진 유리정원처럼 훼손되고 굴절된 것이다.


 들뢰즈와 라캉을 통해, 이제 <유리정원>은 삶과 죽음의 클리셰를 역전시켜버렸다.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 육체들의 도시가 보여주는 ‘생명-움직임’이 죽음을 상징하게 되고, 흐름을 멈춰버려 초록색으로 썩은 강물과 침묵하는 나무들의 숲이 보여주는 ‘죽음-멈춤’이 도리어 생명을 상징하게 되는 역설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왜 (어쩌면 죽었을) 재연이 나무가 되었는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은 자의 초록 피를 자기 몸에 주사한 재연은 숲의 안개 너머, 즉 꿈의 세계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무처럼 몸의 절반이 굳은 지훈이 다시 숲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 나무 안에 담긴 재연의 형상을 만나게 된다. 재연의 죽음은 나무의 멈춤과 침묵 속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유리정원>의 동굴과 공포

 재연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나무와 인간이 하나 되기, 또는 인간의 나무되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에서는 이뤄지지 않는다. 일상에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유리정원과 숲이라는 꿈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이 영화 <유리정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의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숲은 그 자체로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 말이다. 숲에 내재하는, 또는 끝까지 은폐하고자 하는 장소는 바로 유리정원 뒤에 숨어있는 움집이다. 그런데 그곳은 기괴하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느껴진다. 지훈이 호기심에 찾아가게 되는 그곳은 최후의 비밀이 숨겨진 곳이며, 지훈의 시선을 통해 엿보는 그곳은 어두운 동굴처럼 보인다. 부패하는 시체가 거주하는 공간이며, 모든 곳이 막혀있는 막다른 곳이다. 무덤인 것이다.


 문제는 이 공간이 독자 또는 관객이 공포를 느끼는 장소라는 것이다. 왜 그곳은 모든 것이 막혀있는, 어두운, 침묵의, 감춰진 공간이며 공포의 장소인 것일까? 그 장소는 우리에게 아늑하거나 따스한 공간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외적 공포를 경험하는 독자 또는 관객이라면 오히려 이 장소에서 평온함이나 따뜻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여기에서 <유리정원>을 보는 독자 또는 관객이 경험하는 현실이 아직은 여전히 암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불안, 탈출할 수 없는 막막함,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3lgkVjhm-80

                 https://www.pictaram.org/post/BY-9xA-gM5V


이전 17화 영화 <원더Wonder>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