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비 내리는 리스본- 고래군
그녀보다 조금 더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문 밖으로 보이는 흐린 잿빛의 아침 하늘색이 낯설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있을 법한 날씨,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저 짙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색이 아직은 좀 낯설다. 물론 예전에도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흐린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맑은 하늘이 익숙하고 또 인상이 강렬했어야 말이지.
“일어났어? 좀 더 자도 되는데 왜 일어났어.”
“화장실 가려고. 오빠는 언제 일어났어?”
“조금 아까?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네.”
“아 진짜? 오빠 비도 오는데?”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는 문에 달린 창문으로 내다본 그녀가 내게 빗방울 소식을 전해줬다. 아침으로 초리쏘와 수프채소, 쌀을 넣고 죽을 끓여 먹었다.
초리쏘chouriço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이베리아 지역에서 돼지 창자에 돼지고기를 다져넣고 만든 소시지를 말한다.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간혹 보이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는 감히 사먹을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비싸더라. 수입했다고는 하지만 현지 가격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 이상 비싸게 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곳에서는 품질별로 가격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체로 크게 부담 없는 가격에 팔고 있는 덕분에 리스본에 와 있는 동안에는 자주 사먹는 식재료 중 하나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데, 그녀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무겁다. 마치 아프거나 지친 사람처럼 말이다.
“요 며칠 춥다 그러더니, 혹시 당신 감기기운 있는 거 아니야?”
“그런가? 응, 나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다.”
“오늘은 집에 그냥 쉬면서 있자. 날씨도 저런데 뭐. 나도 마침 좀 쉬고 싶었어. 그러고 보면 우리 두바이에서부터 잉글랜드에 더블린에 파루에 리스본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오기는 했다.”
“오빠 말대로 그래서 그런 건가? 나 감기약 미리 먹어둘래.”
그녀는 노트북을 펼치고 한국에서 담아온 드라마를 하나씩 보기 시작한다. 일본드라마인 모양인데, 유쾌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는 중간에 계속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린다.
창밖으로 상 조르쥬 성Castelo de S. Jorge에 나란히 달린 두 개의 깃발이 동쪽으로 거칠게 펄럭인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온 비는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그래 오늘은 좀 쉬자. 일상에는 오늘처럼 쉬는 순간도 포함되는 거니까.
#2. 가끔은 이런 날도 - 미니양
날이 흐려서일까? 아니면 여독이 몰려온 것일까?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못했다. 평소의 나라면 고래군에게 빨리 나가보자고 보챘을텐데, 오늘은 아무 말없이 그냥 늘어졌다. 그냥 늘어져서 쉬고만 싶은 날. 요즘 한국에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일본드라마를 몰아보기로 했다. 사실 오래 전에 시간이 나면 보려고 저장해뒀던건데 우연히 다시 생각이 났다. 3년이나 지난 일본드라마를 포르투갈에 와서 한국인인 내가 보고 있는 뭔가 재미있는 상황?
"미니 뭐해?"
"나 드라마 봐."
"드라마?"
"응. 예전에 저장해뒀던 일본드라마."
"재밌어?"
"응. 오랜만에 재밌어."
"그래요, 재미있게 봐. 필요한거 있음 말해."
혹시 심해질지 몰라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먹고 반쯤 누워서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를 고래군은 옆에서 말없이 지켜줬다. 내 컨디션을 살피며 따뜻한 걸 챙겨주면서. 둘이라서 좋은 건 이런 거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때 옆에 있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혼자 여행할때는 느끼지 못하는 든든함이랄까?
하루종일 누워있자니 살짝 답답하기도 하고, 슈퍼에서 사야 할 것들도 있어서 저녁즈음 옷을 단단히 껴입고 집을 나섰다. 나선 김에 집 앞 전망대도 한 번 봐주고... 오늘 집 앞 슈퍼에 잠깐 다녀온 것이 전부일만큼 하루종일 집에 콕 쳐박혀있었다. 가끔은 이런 날도 필요한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