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 21세기북스, 2019.
여기 한 의사가 있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써 찾아보면 살고 있는 동네에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한, 이른바 ‘동네 병원’의 동네 의사 선생님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 동네 병원에 둥지를 틀기 전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환자들을 마주해야 하는, 응급실에 근무하던 응급의학과 전문의였다.
1초가 아쉬운 상황이다. 감으로 튜브를 밀어넣는다. 다행히 삽입된 튜브로 음식물이 아니라 수증기가 올라온다. 순간 1년 차가 환자 목에 라인을 잡았다. 확보된 라인으로 에피네프린과 아트로핀을 쏘기 시작한다. 열심히 심장 마사지를 하고 있는 인턴의 턱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다른 인턴들은 왜 안 보여!”
-「#24 바쁘다 바빠」 中, 164~ 165쪽.
잡아먹을 듯한 내 표정과 질책에 녀석은 내과 구역의 16번 환자가 좀 이상하다고 답한다. 때마침 내가 내보냈던 1년 차가 환자의 히스토리를 가지고 들어온다. 그에게 CPR을 잠시 맡겨둔 채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인턴과 함께 내과 구역으로 뛰어간다.
저쪽 구석에 보이는 16번 침대의 커튼 너머에서 환자의 구역질 소리가 들려온다. 동시에 침대 아래로 피가 줄줄 흐른다. 달려가 잡아 뜯을 듯 커튼을 열어젖힌다. 환자도 침대 시트도 내 시야에 들어온 것 모두가 온통 붉은색이다.
-「#24 바쁘다 바빠」 中, 165~ 166쪽.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을 어떻게든 삶의 이편으로 끌고 오고자 온몸에 환자들의 피를 묻히던 이 의사는, 따라서 그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 붙어살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동네에서 우리 아이가 감기 걸렸을 때, 비오는 여름 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가 발톱이 부러졌을 때, 봄이 되어 꽃가루와 함께 비염이 심해졌을 때, 혈압이 높은 아버지가 혈압약을 받아야 할 때 찾아가는 동네 병원에 앉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죽음에 가까운
그리고 이제 여기 그의 환자들이 있다. 동네 병원에 찾아오는 어렸던, 하지만 이제는 제법 커서 성인이 되어가는 환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앓음’들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이 지긋한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까마득한 선배 의사를 만난 어색함을 뒤로한 채 그저 70대 암환자의 불편함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그 역시 그저 환자로서 나를 만나려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어떤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는 처방전 한 장을 건넸다. 그의 아내가 지금 복용중인 혈압약의 처방전 복사본이라고 했다.
- 「#38 선물」 中, 252쪽.
“그이가 보름 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약도를 그려주면서 이리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내게 택시 정류장과 1층 약국 그리고 시장 입구가 그려져 있는 약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세요’라는 글자가 꾹꾹 눌러 써져 있는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나는 그제야 부랴부랴 책상 서랍을 뒤져 까마득한 선배 의사에게서 받았던 처방전 복사본과 함께 잠시 잊고 지내던 기억을 소환했다.
- 「#38 선물」 中, 253쪽.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의사에게 때로는 찾아오던 이들이 죽음 저편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경험하게 한다. 의사는 그들에게서 죽음이 아직은 한 걸음 저편에 떨어져 있는 모습들을 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죽음이 한걸음씩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습도 목격하게 된다.
그들의 일상
‘죽음’이 일상인 그들에게서, 역설적으로 독자들은 삶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상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작은 배려와 친절을 의사가 환자들에게, 그리고 환자들이 의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방적 ‘증여’가 상호간에 발생하는 이런 현상에서 의사는 삶의 충만함 내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조금씩 엿보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독자는 무겁거나 버겁지 않은 문득 미소 짓게 만드는 에피소드들이 담긴 산뜻하고 편안한 문체 사이에서 걷는 기분 좋은 산책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마 책의 내용이 여기까지라면 의사의 독백은 어쩌면 전체가 아닌 일부만을 보여준 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충만함’이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같은 신비주의적 단어들의 또 다른 이름은 ‘진리’이다.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 혹은 결코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언제나 인간에게 그 흔적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 하나 더 이 책에 등장한다. 바로 ‘죽음’이다.
의사는 자신이 여전히 죽음을 직접 마주해야 했던 기억들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제 더 이상 그런 급박하고 괴로운 일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조그만 동네 의원의 진료실로 옮겨 온 나는 그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나는 여전히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매일 죽음을 목격하던 곳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뿐 여전히 내 사람들은 죽고, 살아나고, 떠나고, 남겨지고 있었다.
- 「#17 끝」 中, 130쪽.
응급실에서 맞닥뜨려야만 했던 생생한 [죽음=/≠삶]의 기억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고백 때문에, ‘사실 나는 괜찮지 않나’는 에필로그의 제목이 의미심장한 기세로 다가오게 된다. 비록 에필로그의 내용은 동네 의사로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 소소한 불평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앞선 고백을 염두에 둔다면 에필로그에 미처 말하지 못한 ‘잔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의 수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삶이 일상이고 일상이 삶’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평소 수필 장르의 글들을 일부러 찾아 읽고 하는 편은 아니다. 그와 같은 일상을 이미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의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죽음도 일상이고 삶인데, 혹시 그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배타적인 관계 같은 골치 아픈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잠시 쉬자고, 그리고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삶의 곁에 죽음이 ‘사이좋게’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부터 깨달아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