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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l 04. 2019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편견을 깨는 아저씨들의 유쾌한 반란, 그러나 사실은 불안정생활자들의 투쟁



 프랑스의 유쾌한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 2019년 7월 18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영상 문법에 담아낸 작품이다. 따라서 독자 또는 관객에 따라서는 단순히 가볍고 밝은 영화가 될 수도, 혹은 그 심층의 메시지의 독해와 함께 어둡고 무겁게도 볼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작년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처음 상연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작품으로, 2019년 세자르 상César Award에서는 세 개 부문(Best Film, Best Director, Best Original Screenplay)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베테랑 배우이기도 한 ‘질 를르슈Gilles Lellouche’가 감독을 맡았다.


 촬영에 앞서 배우들은 프랑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국가대표팀의 전前 코치와 함께 7개월에 걸쳐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재미있는 것은 작년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국 영화 <스위밍 위드 맨>(Swimming with Men, 2018)과 비슷한 시기에 선을 보였는데, 두 작품 모두 스웨덴에서 있었던 동일한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스포츠 코메디 드라마, 네모와 동그라미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네모와 동그라미’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배치되어 있다. 일단 도입부에는 ‘네모 틀에는 동그라미를, 동그라미 틀에는 네모를 넣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흔히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세상의 편견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고 소외된 사람들이다.


 ‘베르트랑Bertrand’(마티외 아말릭Mathieu Amalric 분)은 2년째 직업을 구하지 못해 백수생활을 하는 중이다. 가정의 수입은 아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과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와중에, 동네 수영장에 붙은 ‘남성 아티스틱 스위밍’ 단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Synchronized Swimming’이라고도 부르는, ‘아티스틱 스위밍Artistic Swimming’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그 구성원들이 모두 남성들이다. 한국에서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중년 남성들 말이다.


 ‘마퀴스Marcus’(베노아 포엘부르데Benoît Poelvoorde 분)는 수영장 판매 사업을 하는 회사를 운영하지만,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그의 회사는 도산 위기에 빠져 있다.


 수영장 관리자 ‘티에리Thierry’(필립 카테린Philippe Katerine 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놀림 받고 왕따 당하는 직원이다.


 ‘시몽Simon’(장위그 앙글라드Jean-Hugues Anglade 분)는 무명 록 가수이다. 마땅한 집도 없이 트레일러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다. 딸 ‘룰라’(노이 아비타Noée Abita 분)의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며 딸과 만나고 있다.


 ‘로랑Laurent’(기욤 카네Guillaume Canet 분)은 까칠하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스페인 태생이지만 그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며, 양극성정동장애를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있다.


 ‘아바니쉬Avanish’(발라장감 타밀셸방Balasingham Thamilchelvan 분)은 스리랑카에서 온 가난한 이주노동자이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어를 알지도 못한다.


 나중에 합류하게 되는 ‘존John’(펠릭스 모아티Félix Moati)는 로랑의 어머니가 입원해있던 요양병원의 간호조무사이다. 무대공포증과 비슷하게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자리에서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인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지급되는 신경안정제를 빼돌려 상시 복용하고 있다.


 어쨌든 이들 ‘아저씨’들이 뭔가 심상치 않은 사고를 치게 된다. 노르웨이에서 최초의 ‘남성 아티스틱 스위밍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프랑스 대표팀으로서 출전 신청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여성들의 스포츠를, 그것도 뚱뚱한 아저씨들이 겁도 없이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마치 판타지처럼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서사로만 본다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이들 ‘아저씨’들이 세상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불굴의 노력을 다해 승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마지막에 다시 ‘네모와 동그라미’에 관한 메시지가 나온다. 때로는 네모 틀에 동그라미를, 혹은 동그라미 틀에 네모를 끼워 넣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여전히 아티스틱 스위밍 장르는 여성 선수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며, 남성 선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의 경우에도 등록된 남성 선수는 한 명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성에 관한 편견을 극복하고 열정과 노력만으로 승리를 쟁취해내는 스포츠 드라마처럼 보인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말이다.


불안정생활자précariat


 불안정생활자précariat(프레카리아트)는 생활의 기반이 불안정한, 불확실한précaire 계층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에 따르면 프랑스의 경우 ‘일 드 프랑스Île-de-France’(파 리와 베르사유 등이 위치한 지역)의 ‘엥떼르미땅Intermittent’ 투쟁의 현장에 ‘불안정생활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부가된 현상에 주목한다.


 엥떼르미땅은 프랑스의 ‘예술인 특별실업 보험제도’를 말한다. 예술가들이 연 507시간 이상을 일하면 실업보험금을 지급함으로써 예술가들의 활동을 사회 전체가 지탱해주는 것이다. 이는 예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동의와 공감, 그리고 자발적인 지지에 의해 유지되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정불안정을 이유로 2003년 정부가 지급요건 강화·축소를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예술가들이 투쟁을 시작했다.


 사회학자이기도 한 랏자라또는 이 엥떼르미땅 운동에서 새로운 방식의 사회운동 방식을 발견했다. 그에 의하면 삶의 기반이 불안정précaire해진 사람들이, 대화의 공간을 마련하고 ‘연대조직coordinacion’을 형성하는 방식의 새로운 사회운동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계급투쟁이나 성평등을 위한 투쟁이 재생산하는 이분법적 구도를 해체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사회운동의 현장에는 다양성이 공존하고, 다수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지는 복수언어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촛불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는 앞서 보여준 아저씨들 말고도, 이들에게 아티스틱 스위밍을 훈련시켜준 두 명이 더 존재한다. ‘델핀Delphine’(비르지니 에피라Virginie Efira 분)과 ‘아만다Amanda’(레일라 베크티Leïla Bekhti 분)는 젊은 시절 듀오를 이뤄 세계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던 팀이었다. 그런데 아만다가 사고로 인해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얻게 되었고, 이를 비관한 델핀은 알콜 중독에 빠지게 되었다.


 영화에 나타나는 사건의 중심에 위치하는 등장인물들, 즉 ‘아저씨’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두 명의 여성 강사들은 모두 이와 같은 ‘불안정생활자’의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기존의 ‘자본가/노동자’라는 계급 분할에 포착되지 않는다. 이 팀에는 기업을 소유한 사장도 있고, 가난한 이주노동자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기존의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분할에도 포착되지 않는다. 여성적인 스포츠를 훈련하는 ‘아저씨’들과, 그들을 강하게 훈육하는 남성적인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비장애인/장애인’이라는 구분에도 포착되지 않는데, 장애인 ‘아만다’가 비장애인인 ‘아저씨’들을 극한까지 훈련시키며 심지어 가벼운 체벌까지도 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서 보여주는 ‘아저씨’들의 대화, 나아가 델핀과 아만다까지 합류하여 서로가 각자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장면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매우 묵직한 메시지가 형성된다. 대화와 연대의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의 사회운동과 투쟁—아티스틱 스위밍 대회—은 결국 승리하는 서사 구조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르는 정치극Political theatre이자 선동극Agitation Propaganda으로도 볼 수 있게 된다.


 요약하자면 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서사 형식은 코메디 스포츠 드라마의 형태를 하고있다. 그러나 사실 그 중심에는 무겁고 심각한, 정치와 투쟁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영화 제목의 문제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제 이 영화의 제목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Sink or Swim”이다. 이는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헤엄쳐야만 한다는 의미이니만큼 어쩐지 꽤나 신자유주의적인 뉘앙스가 담기게 되어버리고 만다.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라는 한국어 제목도 문제가 있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인물들 중 ‘델핀’과 ‘아만다’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안정생활자, 여성, 장애인 등의 기표가 어떻게 다양성으로 나타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인물들이다.


 결국 영화의 주제의식이 제대로 표현된 제목은 프랑스어 제목밖에 없는 듯하다. 원제는 “Le Grand Bain”인데, 한국말로는 “거대한 목욕탕”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로 가득 찬 수영장 안에서 모든 인물들이 각각의 다양성을 간직한 채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 영화를 관람한 메가박스 아트나인은 기타 일반적인 상영관들과는 다르게 압축된 공간에서 오직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소음이라도 함께 관람하는 관객들에게는 매우 큰 소음이 되는 극장이기도 하다.

 아니, 입구에서도 음식물 먹지 말라고 붙여놓았고,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도 다시 한 번 뭐 먹지 말라고 안내하는데, 도대체 왜 질소 가득 채운 과자봉지를 뜯어서는 빠시락거리면서 그것을 아그작아그작 씹어 먹는 것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반응이었다;;)



 @사실 프랑스어에서 ‘r’ 발음은 ‘ㄹ’로 나지 않는다. 따라서 ‘베르트랑’이나 ‘로랑’보다는 ‘베흐트항’이나 ‘로항’이 좀 더 원래 소리에 가깝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현행 외래어표기법에 맞춰 표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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