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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an 03. 2019

영화 <레토>

우리의 현실도 어쩌면 답답한 흑백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러시아 영화 한 편이 2019년 1월 3일 개봉한다. 빅토르 초이Вйктop Цoй(Viktor Tsoi)라는 소련 출신의 가수의 전기를 다룬 영화 <레토ПЕТО>가 바로 그것이다. 제목인 ‘ПЕТО’는 ‘여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키릴문자에 대응하는 알파벳 ‘LETO’내지는 ‘Summer’ 등으로도 제목이 표기되고 있다.


 영화 <레토>는 러시아의 무대디자이너이자 공연 연출가이기도 한 영화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Кирилл Серебренников의 작품이다. 그는 러시아 국내 상황에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2017년 말부터 사법당국에 의해 가택 연금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덕분에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영화 <레토>의 막바지 작업을 인터넷에 연결도 안 된 컴퓨터로 간신히 마무리했어야만 했고, 결국 미처 완성되지 못한 몇몇 장면은 감독의 노트와 예전의 리허설을 참조하여 완성해야만 했다.


 일단 독자 또는 관객들이 한 가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사실이 있다. ‘빅토르 초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세대를 약간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출신의 까레이스키 선조가 있는 정도에 불과한, 어디까지나 ‘러시아인’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현재 러시아의 사람들에게 있어 빅토르 초이의 음악은 어디까지나 ‘러시아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영화 <레토> 덕분에 다시 알려지게 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이전에도 빅토르 초이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그의 석연치 않은 죽음에 대한 의문과 함께 빅토르 초이의 음악이 당시 젊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대중들을 사로잡았다는 화제성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현재 러시아에서 빅토르 초이는, 한국으로 치자면 아마도 유재하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음악적 색깔은 달랐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음악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일찌감치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



 영화 <레토>는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레닌그라드의 198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19살의 어린 청년 빅토르 초이(유태오 분)와 레닌그라드에서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가수 마이크 나우멘코(로만 빌리크Roman Bilyk 분), 그리고 마이크의 아내인 나탈리아(이리나 스타르셴바움Irina Starshenbaum 분)가 있다. 영화는 그들 사이의 관계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 그리고 빅토르의 음반 녹음이나 공연 등과 같은 사건들을 다룬다.


 빅토르 초이와 마찬가지로 마이크 나우멘코Майк Нау́менко 역시 소련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뮤지션이다. ‘미카일’이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며, 특히 비틀즈와 롤링스톤스, 제퍼슨 에어플레인, T. Rex, 데이빗 보위 등 이른바 웨스턴 뮤직에 일찌감치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닌그라드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그 당시 영어교사로부터 받은 이름 ‘마이크’가 그의 무대이름이 되기도 했다. 영어에 능통했던 덕분에 마이크는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의 음악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하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모습은 영화 <레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은 창백한 ‘흑백’



 영화 <레토>는 두 명의 전설적인 뮤지션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시선은 이 젊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음악을 결코 신격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들의 음악을 전면에 과시하듯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악을 영화의 주력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보헤미안 랩소디>와는 다르게 말이다.


 대신 카메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청년 예술가들의 ‘삶의 조건’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흑백 서사’는 철저하게 ‘리얼리즘’적이다. 기차에서는 적들의 음악을 한다며 이들 젊은 예술가들을 훈계하는 노인이 있다. 이들이 음악을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은 낡은 건물을 개조한 허름한 클럽, 혹은 개인이 자신의 집에 초청해서 여는 아파트 콘서트가 전부이다. 클럽에서는 당국의 관계자들이 관객들이 (서쪽 적국의 그것처럼) 환호하거나 방종한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단속하고, 무대 위의 음악이 불량하지는 않은가를 감시한다.


 그러나 이들 청년들은 결코 방종하거나 방탕하지 않다. 그들은 가난하다. 그들의 삶은 힘겹지만, 마땅한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영화 <레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영화의 중심서사가 빛바랜 흑백 화면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980년대 초반의 레닌그라드는, 자유를 꿈꾸고 희망을 찾아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있어 레닌그라드는 ‘색이 없는’ 공간이었다는 의미가, ‘흑백’이라는 형식 그 자체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흑백 리얼리즘’ 형식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 이미지들이 자신을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재현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마치 ‘과거’의 ‘기록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이 흑백 리얼리즘 서사와 대비되는 두 가지 장치를 영화 도처에 배치한다. 하나는 ‘영화 속 필름’이 총천연색으로 나타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픽효과가 더해지는 ‘초현실 사건들’ 시퀀스들이다.



영화 속 필름, Meta-cinema


 메타시네마는 영화작업을 영화 속 공간에서 보여주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두 가지 효과를 지닌다. 첫째는 영화 속 공간과 시간이 ‘허구’라는 것을 은폐하는 서사 규칙을 깨트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은 미디어에 온전히 의식을 침잠당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다른 하나는 내부에서 제작되는 필름의 내용이 ‘영화 속 영화’라는 점에서 ‘허구 속 허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메타드라마metadrama 구조는 ‘거짓의 거짓’, ‘환상의 환상’ 구조라는 점에서 오히려 진실을 지향한다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영화 <레토>의 메타시네마 기법의 독특한 점은, 흑백의 중심 서사 속에서 촬영되는 필름의 내용이, 컬러풀한 형태로 독자 또는 관객들의 ‘현실’인 스크린 위에 상영된다는 점에 있다. 독자 또는 관객들이 꽤 긴 시간동안 힘겹게 대면하고 있는 흑백 중심 서사는, 그 안의 컬러풀한 기록물 시퀀스들에 의해, 순간적으로 지금-여기에 명징한 진실이며 현실로서 재구축되는 것이다.


 영화 <레토>는 영화 속 ‘흑백 이야기들’이, 컬러를 가지고 지금 우리의 현실에 ‘출몰’하는 현상인 것이다.



메시지: 이것은 사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입니다


 영화 <레토>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그래픽이 개입하는 시퀀스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이기 팝Iggy Pop이나 루 리드Lou Reed, 토킹 헤즈Talking Heads 등의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이 시퀀스들은 그만큼 초현실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정작 그 안의 행위와 사건들은 어쩌면 있을 법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록큰롤 공연에서 관객들이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시퀀스, 혹은 심각한 우울증과 염세주의에 빠진 젊은 청년의 자살 시퀀스 등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시퀀스들에는 공통적으로 마지막에 “이것은 사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달린다.

냉전 시기였던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보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록 음악은 ‘적국 서방을 지지하는’이나 ‘현실을 도피하는 회의적인’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 불량 음악에 불과했다. 1980년대 중반 소비에트 당국은 서방의 록 밴드 음악을 금지하는 리스트를 발표할 정도였다. 당시 당국은 빅토르 초이의 밴드 ‘끼노Kino’와 마이크의 밴드 ‘주빠르크Zoopark’처럼 국내의 ‘불량한 음악을 하는’ 록 밴드 리스트도 함께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는 소비에트의 중심도시인 동시에, 소비에트 록 음악의 중심이기도 했다. 밴드들의 ‘불법적인’ 앨범은 계속 제작 유포되었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과 같은 클럽들은 폐쇄되지 않고 꾸준히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닌그라드 록의 중심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은 공공기관이었다. 따라서 당국의 감시와 검열 또한 록 음악의 곁에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시와 억압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했다. 마치 공기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현실 그 자체’였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바로 그 ‘현실’ 말이다.


 반면 일탈은 마치 꿈과 같은 것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의 관중들처럼 옷을 벗고 춤을 추며 소리를 지르는 행위처럼 말이다. 혹은 기차에서 노래를 부르며 경찰들로부터 도망치는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말이다.


 결국 독자 또는 관객들은 “이것은 사실 일어나지 않은 사건입니다”라는 메시지로부터 두 가지 상상의 가능성을 제공받게 된다. 하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억압된 현실’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고, 다른 하나는 어쩌면 그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지만 당국이나 권력기관에 의해 은폐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의 상상을 하게 되더라도 본질적으로 이 시퀀스들의 이미지가 가진 욕망은 동일한 것만 같다. 빌어먹을 거지같은 현실의 탈출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은 바로 그 마음 말이다.



답답함이나 지루함을 ‘느꼈다면’


 자꾸 비교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보헤미안 랩소디>를 수차례 봤다는 열성 관객들에게는 영화 <레토>는 답답함과 지루함을 견디는 인내심을 시험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온몸을 통째로 울려대는 묵직하고 화려한 사운드가 있다거나 화려하고 다채로운 컬러가 난무하는 것도 아니고, 장면 전환도 느리기 때문에 그만큼 호흡도 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답답하거나 지루했던 것이 아니라, 영화로부터 그것들을 ‘느꼈다면’ 어쩌면 이 영화 <레토>를 제대로 본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독자 또는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지금 우리의 현실이, ‘빌어먹을 거지같은 탈출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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