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2018. 두 번째 리스본 한 달 살기
#1. 날씨가 너무 좋아- 고래군
어제는 모처럼 무척이나 긴 하루를 보냈다. 집을 나서서 알파마Alfama 언덕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때는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이른 아침이었는데, 코임브라에서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와 그라싸Graça에 도착했을 때는 해는 벌써 저물고 밤이 그윽하게 깊어진 시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깨어있는 시간의 길이가 비슷하더라도 밝은 시간대의 비중이 클수록 어쩐지 그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어쨌든 둘 다 워낙 긴 거리를 걸었던 탓에, 어제 우리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대략 20킬로미터 가까이, 그것도 산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높은 언덕길을 오르내렸으니 말이다. 한참을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어있던 나는, 하지만 현관문에 달린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오늘도 무척이나 맑을 것이라고 속삭이는 소리에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침대에서 벗어났다. 뭔가 먹을 것도 필요하다. 캡슐을 꺼내 에스프레소를 한 잔 뽑고, 컵에 우유를 담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한참 더 잘 수도 있겠다 싶은데 빵이라도 구워 먹을까.
그 때 갑자기 그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걱정 어린 아침인사를 건넸다.
“벌써 일어났어? 왜요. 좀 더 자도 되는데?”
“눈이 퉁퉁 부은 것 같아.”
하며 걸어 나오는 그녀를 위해, 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낸 다음 컵에 반 정도 찰 만큼 따라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침 뭐 먹지? 당신 더 잘 줄 알고 빵이나 구워먹을까 했는데.”
“빵 굽고, 햄이랑 구워서 치즈랑 샐러드랑 먹지 뭐. 오빠 시리얼 먹고 싶으면 같이 먹고.”
“평소 먹던 것처럼?”
“그렇지 뭐. 그나저나 오늘도 날씨 좋은 모양이네.”
오늘 하루 쉬자고 어제 밤 약속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날씨도 저렇게 좋은데……. 이렇게 머무는 시간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데……. 피곤해서 쉬고 싶기는 하고……. 이런 마음이 서로 엉켜있는 그런 감정이 그녀의 마지막 말에 담겨 울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어떤 생각이나 판단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의 감정을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우리 밥 먹고 나가자!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안 되겠어!
그렇게 오늘의 바깥나들이가 결정되었다. 우리 오늘 피곤한데 괜찮겠냐고 묻는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보다는 싱그러운 기대와 설렘이 차오른다. 그녀가 나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그리고 나는 마치 원래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답했다.
“나가면 어디로 가?”
“LX Factory도 있고 아니면 떼주 강 배타고 건너보는 것도 좋고 그것도 아니면 당신 가보고 싶은 데 있으면 거기 가도 좋고. 그냥 나가서 걸어 다녀도 좋을 날씨잖아!”
“LX 팩토리는 다음에 날씨 안 좋거나 하루 종일 작업해야 하는 그런 날에 가도 되니까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선택한 곳은 떼주 강 건너기였다. 며칠 전 내가 지나치듯 ‘강 건너편에 보이는 저곳이 궁금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며 우리가 선택한 행선지는 ‘바헤이루’였다.
#2. 갑작스럽지만, 바헤이루Barreiro 방문- 고래군
바헤이루Barreiro는 세투발 구역Distrito de Setúbal에 속하는 작은 도시 이름이다. 지리적으로는 세투발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리스본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일종의 위성도시이다. 바헤이루는 리스본 남쪽의 알마다Almada나 동쪽의 몬티조Montijo와 함께 리스본과는 떼주 강Rio Tejo을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이 동네가 재미있는 게, 보통 사람들이 리스본을 오갈 때 페리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앞에 말한 두 도시들은 차를 타면 금세 다리를 건널 수 있는 반면, 두 동네 사이 리스본 남동쪽에 있는 바헤이루는 다리들과 애매하게 거리가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방에 약간의 간식과 물을 넣고, 선글라스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쨍한 남유럽의 맑은 날에 선글라스는 패션이 아니라 필수용품이다. 그냥 나갔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눈을 가늘게 뜨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떼주 강이 넘실대는 꼬메르시우 광장. 선착장 ‘테르미날 테헤이루 두 파쏘Terminal Terreiro do Paco’에서 배를 타기 위해서이다. 꼬메르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의 또 다른 이름이 ‘테헤이루 두 파쏘Terreiro do Paco’인데, 한국어로는 대충 ‘궁전 앞마당’ 정도이려나?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무너지기 전까지는 왕의 궁전이 있던 곳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한다.
파도에 흔들리는 페리에 승선한 사람들이 서른 명 남짓이었는데, 페리의 크기에 비해서는 승객이 거의 없는 상태라 그런지 좌석은 거의 다 비어있는 상태이다. 아마 출퇴근 시간대가 아니기 때문인 모양. 배가 떠나고 대략 30분 정도 지났을까? 왼편으로 바다 사이로 길게 뻗은 모래사장이 보이자, 머지않아 우리는 바헤이루 선착장Terminal do Barreiro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넓은 주차장 건너편으로 슈퍼마켓 ‘핑구 두세Pingo Doce’의 커다란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나저나 이제 저 간판만 보면 왜 자꾸 뭔가 두손 가득 장보기를 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선착장은 곧장 기차역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리와 함께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차를 타는 그들과 이별한 우리는 기차역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항상 그렇듯 그냥마냥 걸어 다니는 거지 뭐. 그나저나 방금 만났던 기차역은 최근에 새로 생긴 모양이다.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가 이제는 폐쇄되어버린 낡고 버려진 옛 기차역이 우리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카페와 상점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기차역 건물 안을 지나자 바닷가를 따라 시내로 향하는 길이 나타났다. 길 양쪽으로는 수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제법 긴 길이었지만 인적은 전혀 없었다. 우리처럼 걸어서 가는 사람은 없나보다. 하긴 여기 산다면 대부분 기차를 타거나 혹은 이렇게 주차해놓은 차를 타거나, 아니면 버스나 택시라도 타거나 하겠지. 그나저나 방금 마주친 쓸쓸한 옛 기차역의 이미지가 존재감을 워낙 뚜렷하게 발하는 바람에, 그것이 바헤이루의 첫인상이 되어버렸다.
남겨진 기억과 흔적들에 아련하게 마음을 사로잡혀버려서인지,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꾸만 뒤돌아보는 나를 붙들고 앞으로 걸어가게 만드는 것은 역시나 그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련을 남겨두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빨리 오지?” 하는 그녀의 재촉처럼, 느지막한 시각에 나와서 그런지 해가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길 양쪽으로 한국과 비슷하게 높다란 공용주택―한국에서는 아파트라고도 부르는, 하지만 한국과는 분명 형태와 분위기는 다른―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좀 더 걸어 안쪽으로 들어서자 작지 않은 공원이 하나 나타났다. 이름이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공원Parque Catarina Eufémia이다.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가자, 공원에 딸린 널따란 광장이 나타나고 그곳에 알프레두 다 시우바Alfredo da Silva라는 어떤 아저씨의 동상이 서 있다. 광장 한 편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는 음식점과 카페 등이 있는 시장 건물이 있다. 이름이 차 시장Mercado Do Chá이란다. 시장을 지나쳐 더 걸어 올라가니 로터리가 나타나고, 그 건너편으로는 바헤이루 중앙 쇼핑몰Centro comercial Barreiro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의 바헤이루 탐험은 여기까지였다. 늦게 집을 나선 탓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이제 걸음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가 배고프지 않냐고 묻는다.
“오빠 배 안 고파?”
“조금 출출하긴 한데, 아까 핑구 두세 가서 뭐라도 사먹을까?”
“거기까지 언제 가. 나 지금 배고픈데? 아까 시장 건물 길 건너에 있던 빵집 갈까?”
“빵집 있었어? 그래 가자.”
앙드레Andre라는 이름의 이 빵집Pastelaria에는,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매한 시각임에도 사람이 꽤 있다. 우리는 각각 카페 한 잔씩, 그리고 다섯 개에 3유로 하는 빵을 주문하고, 가게 앞에 내어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한 빵들은 금세 나왔는데, 그런데 맛있어보여서 내가 골랐던 소시지 끼운 빵이 무척이나 짜다. 소시지는 뭔가 뭉개지는 식감이고 말이다. 심각하게 짠 걸 억지로 다 먹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수프랑 같이 먹었어야 하는 모양이다. 배는 채웠지만, 뭔가 아쉽다.
“오빠, 우리 포르투갈에서 살려면 이 동네도 괜찮겠다.”
“나는 별로.”
“왜? 조용하고, 리스본보다 물가도 조금 더 싼 것 같고.”
“아무튼 나는 별로.”
방금 빵에 대한 아쉬움을 괜히 그녀에게 풀어본다.
#3.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 고래군
다시 배를 타고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바헤이루 선착장에서 행선지별로 부두가 여러 개 있어서, 리스본으로 가는 배 타는 곳을 찾느라 좀 헤맸던 것을 빼고는 무사히 잘 돌아올 수 있었다.
꼬메르시우 광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떼주 강이 끝나는 쪽 수평선과 지평선을 향해 태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도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배에서 내려 터미널을 벗어나자마자, 왜 그러냐는 그녀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며 그녀의 손을 붙들고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도 소리 울리는 강가에 그녀와 함께 멈춰, 서쪽을 향해 그녀와 나란히 섰다. 타오르는 태양이 서쪽 끝 인식의 한계 너머를 향해 점차 가라앉고 있다. 가라앉을수록 더욱 붉게 타오른다. 하늘의 색도 수백 수천 가지로 물든다. 처음 보는 광경이다. 낮이 끝나가고 밤이 다가오는 순간이 이렇게나 장엄하다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나 하늘의 색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문득 백팩에 담아 왔지만 마시지 않은 수퍼 복Super Bock 캔맥주 두 개의 존재가 기억났다. 맥주에 환호하는 그녀와 함께 돌 위에 앉아 맥주를 꺼내들고, 다시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우리 말고도 많은 여행자들이 그 장엄한 순간을 함께 바라보고 있다. 어떤 이는 연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그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홀로 서 있던 또 다른 여행자는 우리처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보는 이도 있다.
나도 몇 차례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녀도 사진에 담아보려고 도전한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 보아도 지금 눈에 담기고 있는 이 풍경을 결코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대신 나는 그저 그 순간을 바라보기로 한다. 문득 그녀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고마워. 옆에 있어줘서. 여기에 나 데리고 와 줘서.”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나도 고마워”라고 대답해 주었다.
@ 아까 공원 이름이 궁금해서 조금 알아보았다. 카타리나 에우페미아Catarina Eufémia는 그녀의 슬프고도 참혹한 죽음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포르투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인물이다.
사건의 발생은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덜 지급된 일당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다른 열세 명의 여인들과 함께 감독관을 찾아갔고, 겁에 질린 감독관이 지주와 경찰을 불렀다. 경찰은 노동자들의 고충에 대해 증언할 사람으로 카타리나를 지목했다. 경찰 중위의 질문에 대해 카타리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일자리와 빵”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경찰 중위는 그녀를 밀어 넘어트렸는데, 카타리나는 일어서며 “차라리 날 죽여!”라고 외쳤다.
그러자 경찰이 총을 꺼내 카타리나에게 세 발의 총알을 발사했고, 카타리나는 척추가 파괴되는 심각한 중상을 입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있던 여덟 살 아이와 다른 농민들도 함께 부상을 당했다. 카타리나는 그 와중에 도착한 지주의 손을 붙들고 있다가 몇 분 뒤에 숨을 거두었고, 지주는 카타리나의 시체를 그녀가 흘린 피 웅덩이에서 꺼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6세였다.
포르투갈의 유명한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가 집권하던 시기 발생한 이 비극적인 사건은 수많은 포르투갈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그녀가 살해당할 당시 임신 중이었음이 알려지게 되면서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불타게 된다. 당국은 대중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그녀의 장례식을 비밀리에 치르고자 시도했으나, 사람들이 장례식에 대해 알아내고 항의의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관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란이 발생하자 그녀의 관은 장례식장에서 신속하게 치워졌다. 결국 그녀의 유해는 사건이 일어난 베자Beja의 발레이장Baleizão에 있는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그곳에서 10㎞ 떨어진 그녀 남편의 동네에 묻히게 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20년이 지난 1974년이 되어서야 발레이장의 공동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카타리나 에우페미아는 그녀의 고향 알렝떼주의 ‘포르투갈 사회주의 정당’에 의해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아이콘으로 채택되었으며, 많은 시인들과 음악가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