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들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사람,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 낯선 이방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다가왔던 사람, 그리고 비록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여행 중인 나의 곁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그 모든 사람들이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머릿속,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는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그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기억에 새겨질 때가 있다. 내가 만나고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여유 있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서 만난 어떤 할아버지는 고고학 박물관에 갔다가 알게 되었는데, 자신의 할머니였나 할아버지였나 아무튼 조상이 그리스 사람이라고 했던 프랑스 할아버지였다. 본인도 혼자 여행하고 있어서, 마찬가지로 혼자 여행하는 동양의 여자애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우연찮게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 식사에 초대를 받았다. 그 할아버지는 아테네의 여느 식당에 가서는 그리스 음식을 먹으면서, 그리스에 대해 아테네에 대해 알려주셨다. 가난하게 여행하고 있던 내게 밥도 사주신 것이다. 거기다 숙소까지 가는 버스 정거장까지 배웅도 해주셨다.
그리고 마드리드 호스텔에서 만난 또 다른 할아버지도 기억에 남는다. 11월 말이 되었는데도 반바지를 입고 호스텔을 누비는 나에게 "Strong Girl"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날씨가 추워졌는데도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사실 출발할 때에는 춥지 않았어서 반바지를 챙긴 건데... 그냥 옷이 마땅히 없었던 건데...) 그 후로도 그 할아버지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Strong Girl!"이라고 부르며 재미있어 하셨더랬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와 점점 친해져서, 나중에는 스페인에서 만나 잠깐 동행하고 있던 일행들의 저녁 식사에 할아버지를 초대하기도 했다. 지금도 잘 지내고 있으려나 궁금하다.
어느 여름 알리칸테에서 만났던 할아버지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길바닥에서 헤매는 나를 도와주고 싶어서 엄청 노력하셨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몸짓, 발짓으로 겨우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느 길거리 계단에 앉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가면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 덕분에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안달루시아 지방을 무사히 여행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최근 가장 마지막으로 리스본 한달살기를 했을 때 보았던 노부부도 생각이 난다. 사실 이 부부와는 딱히 대화를 나누거나 인사를 한 것은 아니다. 그냥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하던 슈퍼마켓에서 여느 때와 같이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그들의 모습은 보게 된 것 뿐인데 그 모습이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끔 떠오르게 된 것이다. 내가 봤던 그분들의 모습은 이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와 같은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샀는데, 슈퍼마켓 앞에서 할아버지는 등에 멘 백팩을 연 채로 서 계시고, 할머니는 그 백팩에 장을 본 물건들을 담고 계셨다. 하나하나 물건들을 전부 담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백팩을 닫고는 할아버지 옆으로 가 팔짱을 끼셨다. 할아버지는 남은 짐이 든 비닐봉지를 다른 손에 들고는 할머니 옆에서 함께 천천히 걸어서 돌아가셨다.
오랜 기간 해왔던 듯 익숙한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그냥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 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행 중에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할머니가 된 내 체력에 맞게 나만의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늙었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