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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Sep 26. 2018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수세미를 수세미라 부르지 못하나니


쉬는 날, 풀어보는 수세미 썰

얼마 전, 가벼운 소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박스를 열어보니 빼빼 마른 섬유 덩어리 두 개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지요. 빼빼한 것의 정체는 '천연 수세미'. 예전부터 집 안에 들여오려 벼르고 있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던 신문물입니다. 과연 잘 씻길까 싶기도 하고, 마르쉐(서울에서 열리는 한 장터)*에서 본 '천연 수세미' 한 조각 가격이 '스폰지 수세미'보다 꽤 비싸 망설이고 있었지요. 손바닥만한 것이 4,000~5,000원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찬장에는 예전에 1+1로 함께 딸려온 아크릴 스펀지 수세미 한 개가 교체 선수마냥 덩그러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연 수세미'로 넘어갈 마땅한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있었지요.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교체선수 '아크릴 수세미'가 필드(설거지)에 나와 한동안 뛰다가 회색 낯빛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다 싶어 '천연 수세미'를 주문했지요. 덕분에 교체 선수는 화장실 바닥 청소용으로 강등(?)되었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전에 화장실 타일과 바닥을 한동안 담당할 예정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천연 수세미'를 조우할 시간입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쪽딱한 통 수세미 하나에 (배송료 불포함) 4,500원. 다른 형태로 재가공하지 않고, 수세미 열매 모양 그대로 껍질만 벗긴 것을 통 수세미라 합니다.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줄 요량으로 통 수세미 두 개를 샀지요. 칼로 자르니 총 14조각이 나왔습니다. 자연 그대로 말렸기 때문에 크기가 저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개당 5~7조각 정도가 나옵니다. 경제적으로도 꽤 괜찮은 선택이지요(나중에 알았지만, 물에 적시면 빳빳함이 사라져 부피가 그만큼 줄어듭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보통 '스펀지 수세미'보다 크다 싶을 정도로 자르는 것이 좋을 듯해요).

'천연 수세미'를 사용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 하나가 있습니다. 섬유질이 얼기설기 엉켜있는 특성상, 형태가 잘 구부러지기 때문에 도시락 주변부나 텀블러 뚜껑 틈새에 끼여 있는 이물질을 미세하게 닦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미세한 틈을 닦는 작은 솔 같은 것을 따로 구매하거나, 뻣뻣하고 두터운 '스펀지 수세미'나 '아크릴 수세미'로 미세한 틈새 찌꺼기와 씨름을 벌일 일도 없어졌습니다. 기름때나 음식물을 깨끗이 닦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 많던 수세미는 어디로 갔을까?

부엌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자란 귀동자 아닌 이상, 부엌살림하는 누구든 설거지는 꼭 하기 마련입니다. 자취 생활 13년 차, 그동안 제가 버린 스펀지, 아크릴 수세미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사실 최근 들어서까지 수세미의 말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되려, 그 표면에 살고 있는 세균 수에 더 집착하며 살았지요. 땟국물 낀 수세미를 보면 기분이 그리 상쾌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살림 9단들이 보는 프로그램이나 홈쇼핑 광고에서 수세미에 대한 과도한 정보를 섭취한 결과기도 하지요. 살모넬라, 대장균, 포도상구균 등 젖은 채 방치된 스펀지 수세미에는 변기나 쓰레기통보다 더 많은 세균이 살고 있다카더라... 이런 현미경 없이는 알 수 없는 정보들 말입니다. 사실 세균이 득실대는 수세미는 식초에 하룻밤 푹 담가두거나, 삶으면 살균할 수 있지요. 하지만 슈퍼에서 1,000원이면 쉽게 살 수 있는데 되려 살균하는데 누가 공을 들일까요? 세균 문제 때문에 한동안 아크릴 수세미가 유행한 적도 있습니다. 화학섬유로 이뤄진 아크릴 섬유는 세균이 증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균 문제의 대안으로 떠오른 아크릴 수세미는 미세 플라스틱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떠안고 있습니다. 흔히들, 미세 플라스틱이라고 하면 '스크럽제'나 '치약'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미세 플라스틱은 합성 섬유로 만든 옷 등을 세탁할 때마다 섬유가 미세하게 마모되면서도 발생되기도하지요. 아크릴 수세미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미세 플라스틱이 함유된 생활 폐수는 하수 시스템으로는 걸러내지 못하고 바다로 유출됩니다. 우리가 먹는 조개류나 물고기에서 미세 플라스틱(또는 플라스틱 덩어리!)이 발견되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뿐만 아닙니다, '세균 증식 억제'라는 카드를 꺼내 든 신제품 합성 수세미에는 '트리클로산'이라는 항생물질이 첨가되어 있지요. 이 물질은 토양 내에 침출 되면서 해양 오염과도 이어집니다. '트리클로산'은 암, 발육 장애, 피부 발진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 봤자 '수세미'인데 싶겠지요. 한데, 2013년 기준 연간 미국의 '수세미'시장 규모는 4억 1500만 달러(우리 돈 4,633억). 그것도 연간 시장 성장률을 따지자면 2018년 현재의 규모는 더 클 것입니다. 한국의 '수세미' 시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미국보다 6.5배 적은 한국 인구수로 추산하여 역 계산하면 우리 돈 712억 원의 규모네요. 이것도 2013년 기준으로 추산된 시장 규모입니다. 수세미의 생애 따윈 안중에도 없었지만, 매년 700억 원 이상의 썩지 않는 폐기물이 국내에서만 생산되고 결국 버려집니다. 오죽하면, 수세미 살균기까지 나올 정도라도 하니 이런 제조업계의 로비로 인한 '세균'에 대한 공포가 필요 이상으로 작동하고 있는게 아닐까요?


수세미를 수세미라 부르지 못하나니

'천연 수세미'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없어 인터넷 쇼핑의 힘을 빌렸습니다. 검색창에 수세미를 치면 '천연 수세미'가 제일 먼저 나올 줄 알았지요. 원래 '수세미'의 어원 자체가 열매인 '천연 수세미'로부터 나온 것이니까요. 검색창은 대신 '깔끔한 일회용 수세미', '제로 스크래치 수세미' 또는 '떼어 쓰는 칸칸 수세미'같은 사용자의 편의성에 초점을 둔 상품을 먼저 노출했습니다. 한동안, '천연'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못해 바보같이 눈을 꿈뻑이며,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때까지 '수세미 수세미'만을 검색창에 여러 번 쳤지요. '수세미'는 '수세미'인데?라 되뇌이면서요. 그러다 누군가의 포스팅을 보고 '천연'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한데, 원래 '수세미'로 불려져야 하는 '수세미'는 이제 '천연'이라는 단어가 붙지 않고서는 그 실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세미를 수세미라 하지 못하나니, 앞으로 '천연 수세미'가 상용화돼서 '스펀지/아크릴과 같은 합성 수세미'로부터 이름을 되찾기 바랍니다.

돌아와, '천연 수세미'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수세미는 박과 덩굴 식물로 한 해살이 식물입니다. 더운 지역에서 잘 잘라며 6-8월 경에 꽃을 피웁니다. 방금 검색하다가 안 것인데, 꽃의 조직이 튼튼해 곤충이 웬만하면 뚫을 수 없고, 다른 작물들과 같이 키울 때 벌레들이 수세미 꽃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유인 식물'이라고도 일컫는다 합니다. 즉, 다른 작물과 함께 키우는데 유리한 종이라는 말이지요. 아직 영글지 전의 어린 수세미(초록색)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고, 지금처럼 설거지 '수세미'로 사용하려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양분이 다 빠져나가고 해골만 남았을 때(가벼워졌을 때), 물에 한번 삶고 말리면 조직이 섬유처럼 변하여 '수세미'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외에 자신을 'Late Bloomer(대기만성형의 사람)'라고 소개하는 한 유투버가 수세미(Luffa) 키우는 방법을 지주대 세우는 것에서부터 삶아 말리는 것까지 촬영한 비디오가 있어 이곳에 공유합니다. 짧은 시간 내에 수세미 파종부터 삶기까지 전 과정이 들어있어 유용한 비디오입니다.

Kaye Kittrell | Late Bloomer Urban Organic Garden Show 발아부터 시작하는 제대로 된 수세미 키우기 영상

수세미 한번 키워보자고 마당에 지주대 공사를 저리 크게 하는 걸 보니, 중산층 백인 클라스의 스멜이 느껴지는군요. 저렇게는 못하겠지만, 내년 즈음 부모님이 계신 시골에 '천연 수세미'를 한번 심어볼까 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어린 수세미로 만든 요리도 시도해봐야겠습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조례대 옆 한 켠에 덩굴과 식물을 키우는 아치형 철구조물이 있었습니다. 여름에 주렁주렁 파랗게 매달린 열매가 오이 치고는 크기가 커 의아해했는데, 누군가가 그게 수세미라고 이야기해줬지요. 그때, 수세미를 '스펀지'로만 알고 있던 저는 '천연 수세미 열매'로 '합성 수세미'를 만드는 줄 알았지요. 그때 알던, 수세미를 20년이나 지나서야 제 생활 안에 품게 되었습니다. 수세미 하나 가지고 길게 떠들었네요. 글을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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