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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Dec 17. 2018

실재가 더 이상 투명하지 않을 때

계기의 탄생

어느 날, 출근길에 벽보에 붙은 포스터 하나를 보았습니다

스쳐 지나가듯 곁 눈을 준 것이라, 포스터의 글 귀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떠올릴 순 없었습니다. 다만, '질병' '투명' '신체' 그리고 '더 이상'과 같은 단어들이 조합되어 있는 인상을 받았지요. 검색창에 네 단어를 타이핑하고 난 뒤에야, 대강 어떤 내용을 위한 포스터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소개서의 구절을 잠깐 가져와볼게요.


아프게 될 때 몸이 더는 투명하지 않듯, 나를 움직여온 '나의 이야기들'도 더는 투명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질병으로 인한 서사의 '난파 상태'에서... (중략)


사람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더 이상 투명해 보이지 않는 때를 경험합니다. (포스터에도 나와있듯) 불현듯 내게 또는 내 소중한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왔을 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을 때, 이별을 경험할 때, 믿었거나 확신이 있었던 것에 배신을 당할 때 등... 원치 않는 상황의 침범은 일상에 균열을 내고, 예전에 내가 누렸던 것이 온전히 주어진 것이 아님을 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낮은 차원의 '나'로 돌아와 그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헤짚어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면서 모두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습니다. 사건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상황의 심각함)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 상황을 감당하는 사람의 감정/신체적 무게는 실제로 온전한 것이며, 타인의 것과 경도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의 계기

질병 또는 상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람은 자신의 경험치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마주했을 때 이를, '거부> 분노> 무기력> 이해> 받아들임'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요. 일련의 경험을 통해 '가장 낮은 차원의 나'로 돌아온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삶의 다른 페이지로 접어들게 됩니다. 얼마 전, 청년허브 주최로 다녀온 '우리는 무엇을 먹는가?'라는 수업을 기획/운영한 카페 수카라*의 대표 김수향 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요.

한국에 돌아온 지 20년이 넘는 교포지만, 때마침 일본에 강연이 있어 간만에 찾은 그곳에서 후쿠시마 지진을 지하철로 이동하는 도중에 겪었습니다. 후쿠시마로 25km 떨어진 가족들이 사는 곳의 삶은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수돗물에는 세슘이 검출되고,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공기가 오염되고 더 이상 농산물을 예전처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지요(그동안 먹어왔던 쌀, 농산물이 대부분 후쿠시마산이었다고 합니다). 수향님의 고향은 2주라는 짧은 기간, 물, 땅, 공기가 오염되며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연한 일상이 더 이상 당연히 작동하지 않을 때의 상실감. 그동안 자신이 먹는 농산물이 후쿠시마에서 오는지도 몰랐었다던 솔직한 고백 속에 각성이 일어난 것이지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음식이 누구에게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 수 있도록 매개공간을 차리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카페 수카라의 시작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작물을 다품종 소량 생산하는 농부들과 구매자들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거래가 일어날 수 있도록 '마르쉐'라는 시장을 열게 되었다고 하지요.


저의 경우는, 얼마 전까지 심각하게 겪었던 아토피가 제 삶에서 풀어야 할 중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2년 정도 만성적으로 심각하던 상태가 조금 호전되어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형벌 같은 경험. 육체적으로도 고단했고, 정신적으로는 우울감의 연속이었지요. 일상에서 제약되는 것도 많아지고, 하고 있는 일 조차 계속할 수 있을까 의구심의 연속이었습니다. 단지, 겉모습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문제/직업에서의 문제/먹고사는 것에 대한 문제/살고 있는 지역을 옮겨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등 삶의 무수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지요. 그 나이 때 즈음 성취해야 한다고 느껴왔던, 또는 내가 성취하고 싶은 것들이 삶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음은 어느 날, 심각한 아토피로 온 정신을 저당 잡혀 있을 때 걸으면서 했던 생각과 질문입니다.


만성 질환 없이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무감각일까?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동시에 온전하게 피부를 치료할 수 있을까?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몸이 낫는 것 외에 품고 있는 다른 종류 욕망(예를 들어, 자기 증명/자기 성취/사회화)은 늘 부차적인 가치를 지니는가?


당시 상체 그리고 얼굴 부위에 툭하면 올라오는 열감, 간지러움, 쓰라림 때문에 매번 '몸'이라는 것의 실재를 느꼈습니다. 고통만이 '몸'의 유무를 느끼게 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했지요. 일상이라는 것이 고통 없는 '투명한 몸의 상태'위에 쌓아 올려질 수 있는 탑이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선택할 수 있던 일들이 어느 하나도 제대로 성취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지요. 조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이때야말로 내 삶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제 아토피의 궁긍적인 원인이었던 '새집증후군'을 겪으며, 시중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거래되는 '환경 독소를 품은 물질'에 대해 자체적으로 검열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알아야 했고, 찾아야 했지요. 생활양식을 바꿔야 했고, 내가 그간 소비하고 아무 생각 없이 쓰던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버려지는지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일상에 균열이 생겼을 때, 계기가 탄생했습니다.


부언이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대학 시절 선배와 대화가 생각나네요. 한창 아토피로 고생하다가 잠시 호전됐을 때 나눈 대화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토피가 있어서 좀 더 내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복이라며 웃으며 이야기하는 제게 선배가 버럭 화를 냈지요. 그것은 네 삶에 있어서 계속 해결해나가야 할 '중대한 문제'인 거지, 절대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애써 상황을 미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이것을 중대하게 다루는 연습을 하라고 말입니다. 그 대화 이후로, 애써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삶, 사실을 그대로 보는 태도에 대해 질문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지요. 삶의 계기를 애써 미화하지 말 것. 이후의 삶의 현실적인 상황에 충실하며 대처해 나갈 것. 귀에 듣기 좋은 정보만의 편취하며 편견을 강화하지 말 것.


여러분이 겪은 중대한 사건 또는 삶의 방향을 결정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삶에서 언젠가 한 번은 마주할 것이고, 서로 다른 사건들로 또 다른 계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되었든 삶의 건강한 동력이 되기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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