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mize Impact Oct 22. 2020

우리가 동물에게 짧은 제의를 올릴 수 있을 때

우리가 동물에게 짧은 제의를 올릴 수 있을 때

작년,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아토피 때문에 체질 개선을 하려고 8체질을 처음 시도해봤다. 그리고 그 일 년간은 의도치 않게 페스코 채식(육류를 제외한 생선, 달걀 등은 먹는 채식) 비슷한 식단을 지켰다. 이러한 식습관을 시도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분히 개인적 건강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시기에 동물권이나 채식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아쉽지만 지금은 페스코 채식을 하지 않는다. 지금 돌아와 생각해보면, 그 식습관이 나의 건강에 그다지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고, ‘한 사람의 식성이 까탈스러울 때’ 오는 수고로움(식사 메뉴 고를 때 눈치보기 등)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고 또 채식을 끝냈다. 산지 일 년이 넘은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이라는 책은 아직 절반도 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선택적 채식은 지향하고(육식하는 횟수를 의도적으로 줄이는 것),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고 적힌 정육점 포스터 문구에 웃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시골로 이사 간 우리 집은 뒷마당에 몇 마리 닭을 키웠다. 귀한 손님이 오거나, 또는 저마다의 이유로 닭이 갑자기 죽었을 때 아버지는 직접 닭을 손질하고 백숙을 끓여내곤 하셨다. 닭을 잡고, 털을 뽑고, 내장을 빼고, 끓여내는 그 모든 공정이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식구의 눈 앞에서 생략된 채, 닭은 어느새 새하얀 백숙이 되어 식탁 위에 올라오곤 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닭을 잡은 적이 있는데, 나는 집 밖으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너무도 사람의 것 같아서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댄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 외에는 나는 직접적으로 닭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무튼 그렇게 닭이 백숙이 되어 올라온 날은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식구가 모여 한 끼 식사를 맛있게 뚝딱 끝냈다. 하지만 평소에 시판된 닭으로 만든 요리를 잘도 드시는 아버지는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 그때마다 옆에 놓인 잔반들만 끼적하시며 소주를 홀짝이셨고, 우리는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 대충 얼버무리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 만연화되어 있는 육식문화(고기 없으면 밥을 못 먹거나, 치킨이나 곱창을 한가득 쌓아놓고 먹는 먹방에 열광하거나,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가 명언으로 간주되는)는 이러한 ‘공정’ 과정이 눈 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장식 축산으로 대량 생산된 동물들은 누군가가 대신 사육해주고, 죽여주고, 절단해주고 포장되어 우리에게 배달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미 ‘생명’보다는 ‘고기’로 간주되는 ‘동물’을 더 친숙하게 만나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손으로 동물을 잡을 필요가 없게 되면서, 동물은 우리 ‘미각’을 위해서라면 ‘고통을 느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동물권을 논할 때 가끔 다문 3초 정도의 짧은 '제’를 올리거나,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식’에 대해 생각한다. 잡식인과 또 잡식인을 혐오하는 채식인과의 대결구도에서 오는 헛헛함,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건, 나를 위해 음식과 영양분이 되어 돌아온 어떤 생명에 대한 감사함을 떠올려 보는 문화를 수용하는데서 먼저 오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몇 가지 구절을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한다.


파종의 다음 단계는 땅과 물의 영혼들을 달래는 일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다크’와 ‘루’라고 부른다. 흙 속의 벌레들, 개천의 물고기 그리고 땅의 영혼은 쉽게 노여움을 타는 존재들이며 삽질을 하거나 돌을 깨거나 혹은 그냥 땅을 걷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라다크 사람들은 파종을 하기 전 제사를 지낸다.
겨울이 되면 라다크 사람들은 염소나 야크, 쪼 같은 동물의 고기를 특히 더 먹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고기를 먹지 않고는 혹독한 환경에서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선을 먹는 일은 없다. 라다크 사람들은 살생을 해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큰 짐승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생선을 먹는다면 더 많은 살생을 해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런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난 다음에야 동물을 죽이는 이들이 이곳 사람들이다.
나를 등에 태워주고 내 짐을 실어주던 짐승이
이제 나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니,
내게 먹을 고기를 주는 이 짐승이
어서 빨리 부처님의 세계로 갈 수 있도록 하소서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0년, 표정을 읽는 능력은 퇴화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