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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mize Impact Feb 13. 2022

가지 말라는 말을 못 하겠어

오후 12시를 못 넘길 거라는 이야기와는 달리, 아빠는 제법 오래 우리 곁을 머물러주었다.


우리(엄마, 언니, 나 그리고 신랑)는 아빠의 보호자 침대 그리고 비어있는 옆 칸의 침대에 둘러앉아 아빠 곁을 지켰다.


코로나 방침 때문에 늘 보호자 1명 외에는 면회가 어려웠는데, 아빠를 보내야 하는 마지막 날에서야 여러 명의 면회가 가능했다. 누군가의 마지막 앞에서는 병원의 규칙도, 같은 병실을 쓰던 사람들도 모두가 숙연해졌다.


문득 지난해, 코로나 때문에 가족과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사랑하는 떠나보내야 했다는 뉴스 인터뷰어의 울먹임이 떠올랐다.


우리 중 누구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서... 곁에서 손을 잡고 안아주며 임종을 지킬 수 있는 이 순간이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다.


그날 하루는 짧고도 길게 느껴졌다. 곁을 지키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일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손이 원래 그렇게 찼었던가?

손끝과 발끝이 찬 아빠의 손에 온기가 돌 수 있게 우리 가족은 아빠의 손과 발을 만졌다. 보라색도 파란색도 아닌 짙은 색깔 아빠의 손발은 온기에 닿으면 다시 혈색이 도는 빛깔로 돌아왔다. 특히 늘 손이 따뜻했던 언니가 아빠의 손발을 조금만 만져주면, 아빠는 금방 따스해졌다.


아빠 손을 잡은 나의 네번 째 손가락이 아토피 때문에 마디마디 주름마다 갈라져 있자 엄마는 내 손가락에 아빠 욕창에 쓰던 재생 크림을 발라주었다.

"갈 때 예진이 아토피도 좀 가지고 가소..."


오후 다섯 시 정도가 되어, 우리는 얼린 밥을 해동하고 참치 캔, 김, 김치를 꺼내 둘러앉아 아빠 옆에서 밥을 먹었다.

간편식으로 채워진 전형적인 보호자들의 밥상.

그것이 우리의 첫 끼였다. 사는 사람은 살고 봐야지... 라며 우리는 아빠 옆에서 밥을 먹었다.


잠시 후, 엄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찾아와 아빠에게 마지막 기도를 올려주었고 그 기도는 '사랑하는 주님, 사랑하는 분께서 이제 우리 곁을 떠나려 합니다'로 시작했다. 기도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도할 때 눈을 감아야 했는데, 나는 아빠를 더 바라보고 싶었다. 목사님의 기도를 들으며 두 손을 모으고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숨 쉬는 것 외에는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점 즈음, 아빠의 왼쪽을 만지고 있는데 아빠의 새끼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 순간의 힘이 강했다. 아빠의 생명이 느껴졌다. 나는 기쁘게 아빠의 손가락이 움직인다고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백 마디 말보다 기쁘고, 반가웠던 아빠의 움직임...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언니와 아빠의 양손을 잡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아빠랑 손 잡은 느낌을 저장하고 싶다고 했고 언니는 아빠에게 가지 말라는 말을 못 하겠다고 했다.


한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니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우리는 아빠가 회복할 줄 알았다. 회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래도 더 오래 곁에 머물 줄 알았다.


저녁 7~8시가 되어서 아빠의 숨을 이른 오후보다 다소 옅어졌다. 산소마스크를 따라 끄덕이던 아빠의 고개의 움직임도 그리고 산소마스크 끝으로 맺히던 습기도 다소 옅어졌다. 혈압은 낮았지만 심장박동은 정상이었다.


아빠가 이대로 며칠을 계속 계신다고 해도, 아빠는 3~4일에 한번씩 투석을 받아야 했는데 이렇게 혈압이 낮으면 투석 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구나.




아빠가 하루를 더 넘기실 거란 생각에 우선 비상에 대비해서라도 미리 잠을 자두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와 언니는 병원에 남고 나와 신랑은 근처 저렴한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 돌아와 짐을 풀고 불편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고 눈물이 났다. 나는 페이스북으로 사람들에게 아빠가 평안하게 가실 수 있도록 마지막 시간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의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외에는 없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아빠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리 아빠의 마지막 시간을 위해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난 이후의 시간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잠에 든 지, 들지 않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밤  11시 반에서 12시 사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이제 가실 것 같다고


나와 신랑은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뛰어 병원으로 다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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