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zac 을 처방받았다
최근 1년넘게 회사생활이 힘들었다. 나름 미국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 써가면서 10년이 넘게 직장생활을 하니, 말더듬의 고통, 은근한 인종차별 등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아마도 세월이 지나 경력이 쌓여 중간관리자로 넘어오니 그 무게까지 더해졌겠지. 일은 많은데, 내가 내린 잘못된 결정에 뒷탈이 나고 그 책임을 짜증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 내 보스를 보는 순간 처방받은 프로작을 먹어야 겠다라고 금새 생각했다. 나, 열심히 했는데,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게다가 많이 했는데, 그런 나에게 보스라는 인간이 짜증낼 일인가. 너에게 내가 중요하다면서, 너는 네 감정 컨트롤하나 못하고 부하직원의 사기를 그렇게 팍팍 떨어뜨려야 겠나.
몇주전부터 출근길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별을 한것도 아니고 가족이 어떻게 된것도 아니다. 그냥 매일을 살아가던 중이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참을수없는 서러움과 외로움에 며칠을 출근길에 울었다. 그리고 매사에 화가 나고 악몽을 꾸었다.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박에 혹시 우울증 아닌가 생각이 들어 무서워졌다. 가장 친했던 대학시절 친구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 그 때의 여파는 정말 어마무시했다. 친구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과 절망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그것은 도저히,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처절하게 망가지셨고 무너지셨다. 그때 결심했다. 그 어떤 병보다 주변에게 민폐는 우울증일수도 있겠다, 나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내가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객해보았다. 무엇이 나에게 문제인가, 나는 무엇때문에 힘들어 하는가. 그런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체 건강하고, 연인도 있으며, 직장이 있고, 가족들도 무탈하다. 햇빛을 보기 힘들었던 지난 몇달간의 날씨 때문인가. 노후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바쁘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수다를 안떨어서 그런가. 지나치게 과묵한 남자친구 때문인가. 알수가 없어서 정신과를 찾아갔다. 정신과 의사는 내 말을 들어주는 척 하더니 정말 기계적으로 몇가지 항목들을 물어본 후 Prozac 이라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한달 뒤 용량을 늘리자고 말했다. 나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달을 약을 먹으면 나아져서 약을 끊어야 하는것이 아니었나? 늘리자고? 그럼 언제까지 약을 먹으라는 말인가? 이게 비타민처럼 먹으나 안먹으나 몸에 별로 지장이 없는 가벼운 약인가? 그렇다면 왜 처방전이 필요한가? 아니면 당뇨나 에이즈처럼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질병인가? 의사와는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 헤어져야 했는데, 딱히 그 얼굴을 보니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때 가뜩이나 우울해져있었고 만사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처방받아놓고 먹지말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간 동유럽으로. 몸은 힘들었지만 우울기가 싹 사라졌다. 예전의 나의 뇌를 되찾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안도가 되었다. 내가 변한게 아니구나. 나는 멀쩡하구나. 환경의 문제구나. 이것은 나의 뇌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론적인 문제구나. 그리고 나의 환경중에 나를 괴롭혔던 것은 단 하나 회사구나. 여행 후 출근 하루 전날 갑자기 내 몸이 기계적으로 초조해지고 짜증이 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것을 느끼며 내 몸이지만 내가 놀라고 말았다. 그래, 나는 회사에 막대한 부담을 느끼고 힘들어했던 것이다.
회사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짜증이 많이 나있는 중에, 어제는 어버이날이라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 주고받다가, 엄마가 며느리에게 서운한 일이 있다며, 어버이날인데 흰색 카네이션을 며느리에게 받았다고 하셨다. 그것도 누런색도 아닌 정말 눈처럼 흰색 카네이션 한다발을. 죽은사람한테나 바칠 흰 꽃을 주었다며, 화가 잔뜩 나는데 도대체 뭐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나는 또 뒷목이 뻐근했다. 그냥 둘 다 싫었다. 하고 많은 꽃들중에 하필 눈처럼 새하얀 카네이션 한다발 씩이나, 그 의도가 정말 시어머니 한방 먹이려는 것이든 그냥 개념이 없어서 그렇든간에, 비싼돈을 주고 사온 며느리도 싫고, 그걸 가지고 부들부들 떨면서 막상 면전에서는 크게 역정한번 못내고, 그렇다고 넓은 아량으로 애가 몰라서 그랬다보다, 바쁘니 그랬다보다 이해도 못하면서 나에게 이러니 저러니 화풀이하시는 엄마도 싫었다. 만약에 내가 그랬다면 단박에, "야, 너는 애가 그나이가 되도록 이런것도 몰랐냐, 흰색은 죽은사람한테나 바치는거지, 도로 가져가고 다시 사와!" 한마디 하고 다시 사와서 죄송해요 하면 금방 풀어질 일이었을 것이다. 며느리의 모든 것에 대해 예민해지고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한국의 정서도 싫었다. 겨우 여행으로 달래놓은 나의 기분을 나의 가족이 시원하게 다시 리셋시켜주었다. 전화로 전해듣는것은 때로 면전에서 겪는것 보다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젠장할 어버이날따위 왜 만들었는가. 도대체 왜 한국의 문화는 부모 자식간에 저렇게 얽히고 섥혀서 자식은 부모 돈을 왜 바라고, 부모는 또 자식에게 효도라는 억지를 강요하는건지. 나는 한국인이지만,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는 미국의 부모자식 관계를 보면, 도대체 한국의 저 끈끈한 부모자식 그리고 며느리의 관계의 장점이 뭘까라는 의문이 든다. 과연 농경사회에서나 도움이 되었을 관계 아닌가. 명절후 증후군, 명절후 이혼 이런게 다 그 빌어먹을 존재하지도 않는 남의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 아닌가. 제발 며느리는 그냥 남이 되면 안되는가. 이러니까 한국의 여성들이 결혼을 피하는것은 아닐까.
회사에서 받은 짜증에 더해져서, 아름다웠어야 할 어버이날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짜증나는 일이 몇번 더 있은 후 퇴근했다.
나는 지금의 회사에서 받는 연봉을 포기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옮기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늘 노력하지만 아직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이 조건이 개선될때까지 프로작을 복용하며 버티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돈이 나오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