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수가 없는 밤.
여름밤이 이토록 아름다워 나 같은 건 허무할 정도로 존재감을 잃고 만다. 공허한 속은 딱할 정도로 무게가 없다. 자물쇠를 꼭꼭 채워두었던 시간과 기억은 기습적으로 달아나 더운 밤으로 둥둥 흩어진다. 잡을 수도, 후후 불어버릴 수도 없는 것들. 마음에는 축축한 물기가 고인다. 습한 계절의 필연이다.
시간과 기억 사이에 서서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을 건네던 친구를 떠올린다. 마음속엔 폭풍이 불어도 세상 모두를 어루만지던 사람. 그가 건네던 위로는 결국 자기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받고 싶던 마음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쭙잖은 말로 답하는 대신 직접 찾아가 한 번 더 안아줄 걸. 쫓아갈 수 없도록 멀리 보내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를 위해 울었다.
오래도록 열지 않았던 사진첩에서 가장 미운 사람의 아주 어린 시절을 마주한다. 불가능하다. 너무 작고, 말갛고, 무구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귀여움은 강력한 생존 수단이라고 했던가. 애초에 가장 밉다는 거부터 거짓말이다. 지난 꿈에선 그의 살결을 쓰다듬던 감촉이 되살아나, 꿈에서 깨고 나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놀라운 건 꿈속에서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학습이란 그런 것이다.
사라진 자리엔 뭐가 남았을까, 텅 빈 손바닥을 괜히 한 번 쳐다본다. 야속하게 나만이 채 사라지지 못했다.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 와르르 쏟아지고, 주르르 흘러버린 여름밤. 별 수가 없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