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불현듯 마주치게 되는 꽃. 이 꽃의 이름은 능소화다. 그걸 알려준 건 마루 선배. 몇 년 전인가 여름밤 길을 함께 걷다 내가 먼저 ‘저 꽃을 보면 하와이가 생각나요(알고 보니 이 꽃은 중국에서 왔다)’ 했는데, ‘능소화 말이야?’라고 대번 꽃 이름을 얘기해서 놀랐다. 그렇게 랜덤한(내 기준) 꽃의 이름을 아는 멋진 사람이 내 선배라니. 이제 능소화를 마주칠 때마다 선배 생각이 더해지는 걸 선배는 모르겠지. 선배는 이제 내 뒷자리에 앉는다.
2 와락 안긴 친구(A) 품에서(껴안아 인사한다) 천사 같은 향이 나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향수를 선물 받았다. 누가 쓰는 향수를 선물 받긴 처음이다. 누가 쓰는 향수를 따라 산 적도 없다. 내가 쓰는 향수를 준 적은 딱 한 번 있다. 시각이 의식의 영역이라면 후각은 상대적으로 무의식의 영역 아래 있는 듯싶다. 줄 땐 몰랐는데 받고 보니 향을 주고받는 일은 꽤 에로틱한 일이었다.
3 친구(B)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못 본 사이 그는 거대한 슬픔을 지나고 있었다. 내게 밝은 목소리로 ‘괜찮아지는 중’이라고 하니, 되레 그가 나를 위로하는 형국이다. 괜찮아지는 중이라 함은 괜찮다가, 안 괜찮다가, 괜찮은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안 괜찮은 감정이 점차 희석되는 것이다. 그에게 ‘괜찮아지는 순간에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고 얘기했다. 웃기는 순간에 웃고, 배고픈 순간에 음식이 당기면서 나는 그가 스스로를 탓하거나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러나 부디 아무렇지 않게 들리기를 바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선 그러지 않을 나의 착한 친구 대신 내가 신을 저주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