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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Jul 01. 2024

감정의 파도타기

#2 감정의 폭발, 상실 후의 분노와 죄책감

그날 이후, 나는 마치 댐이 무너지듯 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나는 이 힘들고 혼란스러운 시기가 매우 정상적인 애도 반응임을 알고, 이게 치유의 시작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 지식이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더라. 장례식장에서 나와 차에 앉아, 성인이 된 이후 가장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뒤 몇 번의 상실을 겪으며 더 큰 울음이 왔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일상 속 너무나 당연하게 보았고 지나치던 작은 것들이 계속 내 눈물샘을 자극했고, 동료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쓰리고 먹먹하더라. 마음이 아프면 몸도 같이 아프다고 하지 않는가?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아프기 시작하고, 극도의 피로감에 시달리며,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슬픔은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복합적인 경험이라고 거의 매일 내담자에게 설명을 하듯이 하루 종일 스스로에게 최면처럼 되뇌었다.


슬픔과 함께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왜 하필 그였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운명에 대한 분노, 환자의 우발적 행동에 대한 원망, 그리고 "더 잘했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자책감이 반복해서 찾아왔다. 이렇게 상실의 과정에서 분노는 흔히 나타나는 감정이기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의 표현임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나 이런 이론적 지식은 순간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대화들이 떠오르고, 놓친 신호들을 생각하면서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만약 내가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다. "왜 나는 살아있는가"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이런 생존자 죄책감은 예기치 못한 상실 후에 흔히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이렇게 깊게 베여나가는 감정들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상실을 받아들이고 치유되어 가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느끼고, 표현하고, 그리고 서서히 그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는 내가 늘 내담자들에게 조언하던 바였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지 정말 온몸으로 이해되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했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급성 스트레스 반응으로 집중력이 떨어져 실수가 잦아졌고,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사소한 결정조차 어렵게 느껴졌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일이 많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었다. 물론 그들 역시 비슷하게 이 과정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감정 조절이 어려워 동료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소통하는 시간을 점차 피하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기를 겪으면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주변에게 많은 걱정을 끼치지도 하였지만, 나는 삶의 의미와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게 되었고,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질문을 자주 떠올렸다. 이를 통해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현재 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가족과의 관계, 친구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재평가하게 되었고, 표현하지 못한 사랑을 후회하며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깨달았다.  


늘 내담자들에게 강조하던 것,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직접 경험해 보니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나에게 감정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해 주었다.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몸으로 깨달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정직한 소통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고, 감정을 통해 나라는 인간을 조금 더 깊고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아끼던 한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점이 되었다. 상실의 아픔을 통해 나는 더 깊은 자기 이해와 성장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도 이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더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나의 내담자들과 나누며, 그들의 아픔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상실을 경험한 내담자들을 만날 때면, 나 역시 그들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모든 상실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의 본질은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내담자들에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 대신, "지금 느끼는 감정들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임상심리학자로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 필요를 우선시하느라 자신의 감정을 소홀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을 겪으며, 나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치료자인 나 역시 정기적으로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경험은 또한 나의 전문적 실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전에는 주로 인지행동치료에 중점을 두었지만, 감정 중심 치료와 마음 챙김 기반 접근법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캘리포니아에서, 메사츄세츠 주를 오고 가며 공부를 더 깊게 하여 더 폭넓은 치료법을 지닌 치료자가 되기로 선택했다. 감정을 단순히 '관리'하거나 '통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요한 안내자로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말이다.


우리는 종종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다. 이제 나는 매일 아침 깨어날 때마다 감사함을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상실의 아픔은 여전히 나의 일부이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고 공감적인 치료자로 만들어주었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들을 가슴에 새기며, 내담자들과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다.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비슷한 경험을 한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상실과 마주하게 될 때, 나는 조금 더 준비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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