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나에게.
언니, 나 드디어 가게 됐어.
금요일 늦은 오후 걸려온 한통의 전화 속 반가운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 수화기 너머의 그녀 목소리는 근래 내가 느끼지 못한 설렘을 향긋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내겐 무척 특별한 친구였다. 그녀는 늘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그런 그 친구에게는 오래된 꿈이 있었는데 바로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가고파 한 곳은 수녀원이었다. 나는 친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끈질긴 나의 질문에 결국 그녀가 아직 구하지 못한 물품을 털어놓았다. 바로 수녀원 침대에 들어갈 매트였다.
내가 사줄게, 그건!, 나한테 맡겨.
하지만 그녀로부터 받은 침대 사이즈는 기숙사용 침대보다 더 작은 것이었다. 주말 이틀 동안 틈틈이 검색을 했지만 별수가 없어 결국 나는 월요일이 되면 근처 전통시장 안 이불가게를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월요일 아침, 나는 서둘러 아이를 보내고 발길을 재촉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순간 엄마의 전화가 걸려왔다. 딸의 주말 안부가 궁금한 엄마와 시시콜콜한 주말 일상을 나누며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엄마와의 전화를 서둘러 마무리했다.
엄마, 나 주차해야 해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드디어 골목의 오르막길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전화하느라 왼쪽 귀에 꽂혀 있던 무선 이어폰이 '툭' 하고 빠지더니 땅 위에 '탁' 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 비탈길이라 이어폰은 떨어진 곳에서 멈추지 않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앞 하수구 속으로 '통통통' 안착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앞에서 나는 잠시 일시정지화면 속에 주인공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다른 한쪽 이어폰을 귀에서 빼려다 그것마저 떨어져 나가 먼저 간 형제를 따라 퐁당, 하수구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순간 시장에서 외친 나의 외마디 비명.
악
뭐 이런 날벼락이 있나?
순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뻔했다. 나는 즉시 하수구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메마르고 그리 깊지 않은 하수구였지만 사람들이 버린 담배꽁초며 쓰레기들로 매우 지저분해 보였다. 그 틈에서 마치 엄마를 향해 어서 구해달라는 듯 이어폰 쌍둥이들이 배를 보이며 나란히 누워있었다. 하지만 하수구 철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것을 들어 올릴 재주는 없었듯 보였다. 나는 그 순간 깨끗이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자.
그날의 기분을 더 이상 망치기 싫어 발길을 돌려 서둘러 시장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적당한 사이즈의 매트는 없었고 맞출 수도 없다는 대답을 들은 나는 허탈했다. 나는 곧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매트를 구하기 어려운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결국 친구가 아는 수녀님을 통해 매트를 맞추기로 하고 비용만 내가 지불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나는 반쪽짜리 선물을 한 듯해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나의 며칠간의 수고가 다 물거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 오느라 아끼던 무선 이어폰도 잃어버렸지 않은가.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불평들이 올라왔다.
아니 수녀원에서는 도대체 왜 이렇게 작은 침대를 쓰는 거야.
그리고 엄마는 오늘따라 할 이야기가 왜 그리 많으신 거야.
또 나는 이어폰을 낀 채로 차에서 내린 거야.
불편한 마음 위로 남 탓, 내 탓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차 앞까지 왔는데 막상 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기 전에 뭐라도 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오기가 생겼다.
'아니 미련이 남는다면 뭔가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
핸드폰으로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고맙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구출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놓았다. 유레카! 자석 재질의 무선 이어폰은 자석으로 구할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순식간에 정해졌다. 근처 문구점부터 찾을 것, 열심히 뒤져서 자석과 끈, 테이프를 살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하수구에서 낚시를 할 것. 순식간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사고 장소로 달려갔다. 그리고 하수구 앞에 쭈그려 앉아 조심조심 테이프로 자석을 칭칭 감아놓은 긴 줄을 틈 사이로 넣어보았다. 생전 들여다 볼일 없던 하수구 속 광경에 속이 매스꺼웠다. 게다가 줄을 넣는다고 바로 턱 하니 붙을 리가 없었다. 걸려든 이어폰이 올라오다가 힘이 없어 툭 떨어졌던 것이다. 다시 돌아가 자석을 마구잡이로 붙여와서는 다시 쭈그리고 앉아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아이와 함께 한 자석낚시놀이가 꽤나 도움이 되었다. 눈 앞으로 지나가는 발걸음들이 신경 쓰였지만 이내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낚시질에만 몰두했다. 결국 하나의 이어폰이 줄을 따라 하수구 문을 탈출하는데 성공! 하나를 성공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매스꺼움은 어디 간데없고 줄을 열심히 넣어 뒤따라한 녀석도 마저 구출했다. 이 짜릿함과 성취감이란!
그날 내가 느낀 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지난 지금 꼭 하나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언니, 너무 고마워.
언니가 며칠을 알아보고 바쁜 시간 쪼개서 시장까지 간 거잖아.
이어폰 떨어뜨려서 그런 고생까지 하고... 정말 고마워, 언니.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렇게 애써주다니 너무 특별한 선물이야.
사실 나는 필요한 선물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이후부터 순간순간 마음속으로 크고 작은 불평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폰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더 강하게 그 마음이 드러났을 뿐이다. 특별한 나의 친구에게 기억에 남을 선물을 주고 싶었던 순수한 나의 마음도 예상치 못한 수고와 어려움 앞에서는 한껏 초라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수고와 어려움을 친구가 알아주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불평을 하던 내 모습은 걷어내고 내 정성만을 보아준 친구.
나도 그날 하루 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바삐 선물을 사기 위해 운전을 하던 나,
딸과의 대화가 아쉬운 엄마의 마음을 읽어드리려고 수화기를 놓지 못했던 나,
하수구에 빠진 이어폰을 포기하지 않고 건져내려고 한 나
못난 마음만 도드라져 보여서 애썼던 나의 수고마저 묻혀버릴 뻔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그 친구는 나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언제는 내가 완전했던가. 항상 불완전하고 서툰 나,
그럼에도 애쓰고 있는 나를, 내가 먼저 아름답게 보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그날 하수구에서 이어폰만 구출한 게 아닌지 모른다.
늘 나에게 남들보다도 더 짠 점수를 주었던 허름한 마음에서 진주처럼 고귀한 진심을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하지 못한 나를 그대로 인정해주던 친구와의 이별 선물을 준비하며 나는 나도 참 좋은 선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