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2 내집마련의 길(1)
5년간의 대학생활을 거쳤지만, 나는 전공과 전혀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나름 남들보다 가방끈이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서 미련이 남기도 하지만 후회하지도 아쉽지도 않다.
나는 건축을 전공했는데, 다시 19살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고 그 힘든 건축학도의 길을 걸을 것 같다. 건축학의 매력은 아는만큼 보이는 데에 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비전공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캐치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더 "집"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나에게 집이란... 나만의 공간, 나만의 안식처, 때로는 자기성찰의 공간이 되기도 하며 초대받은 누군가에게는 보여지는 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집, 더 확장해서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단순한 크기, 위치나 배치, 분위기 같은 시각적 정보 외에 온도와 재질, 냄새, 소음 등의 정보들도 큰 portion을 차지한다.
급한 마음에 나왔던 할머니집은 회사와의 거리는 가까웠지만, 환기가 되지 않는 골방이었다. 한국의 할머니들이 다 그렇듯, 음식을 많이 하시다보니 침대 매트리스까지 매캐한 음식 냄새가 베었다.
나는 전생에 메뚜기였던 걸까? 이후 8개월동안 3번이나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한 번 집 나와보니 다시 옮기는 것은 두렵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회사에 새로운 여자 합숙소가 마련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합숙소 관리 담당 직원에게 찾아갔다. 방이 남을 텐데 나도 어떻게 안되겠냐고 하니, 검토해보겠다고 하셨다. 결국 나는 합숙소로 이사하게 되었다.
합숙소 생활은 꽤나 즐거웠다. 8월부터 12월까지 성인 이후 가장 많이 웃고, 많이 마시던 생활의 연속이었다. 불안할정도로 원초적인 즐거움을 많이 느끼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때마침 2022 월드컵의 대한민국 16강 진출과 겹쳐 하루가 멀다하고 왁자지껄한 생활을 계속 이어나갔다.
다만 나는 그 와중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계속 느끼곤 했다.
"나 이렇게 아무런 고민 없이 즐겁기만 해도 되는 걸까?"
"이 원초적인 즐거움에 중독되어서 외부의 자극들에 무뎌지지는 않을까?"
처음에는 이 불안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주기적으로 나에게 흘러오는 변화의 물결을 본능적으로 느끼곤 했는데, 이유도 없이 혼란함을 겪다가 다 지나가고 나서야 왜인지를 깨달았다.
지금이 그 시기임을 느낄 수 있었고, 지금 여기서 한 발짝 더 떼지 않고서는 못 베긴다는 사실도 알았다. 한 발짝 떼고 나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가진 것을 손에서 놓기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종착지로서 도달하고 하루하루 무난하고 편안하며 무료한 삶.
그러한 삶을 누리며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점점 이대로는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글도 써 보았고 그림도 그려보았다.
하지만, 내 주 수입원이 되는 일로서도 나의 잠재력과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이전의 삶을 중단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제껏 즐거웠던 생활들이 신기루였던 것마냥, 내가 떠나자마자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합숙소에 더이상 살지 않게 되었다. 그 시간의 나는 떠나야만 했지만, 마음 한켠에는 돌아가고픈 순간으로 아련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