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주 Sep 09. 2021

나를 갈아넣고 일하면 생기는 일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합병 얼마 전 퇴사한 J를 제외하고 S와 H 그리고 나, 세 명이 새로운 팀에 합류했다. 팀이라고 해봐야 그 쪽에서도 원래 일하고 있던 팀원 2명 중 한 명은 퇴사하고 한 명밖에 없었다. 합병 조건은 원래 있던 팀원이었던 C가 팀 리더를 맡는 것. C는 대학을 졸업하고 반 년 전부터 이 서비스를 처음부터 만들어 온 멤버였다.






합병 한달 후 팀 미팅에서 C는 대표의 말을 전했다.


'지금까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못내고 있다. 한달 뒤에도 이대로라면 한 명은 나가야한다.'


나는 얼어붙었다. 그 한 명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S의 통찰력은 큰 조직과 새로운 서비스에서 더 빛났다. S는 자기보다 열 살은 훌쩍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신뢰를 얻어냈다. H는 어디에나 잘 적응했다. 사람들과도 잘 지냈다. 맡은 일은 뭐든 척척 해냈다. 나는 눈에 띄게 잘하는 것도 없었고 헤맸다. 합병을 가장 원했으면서 가장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가야하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다. 나 말고는 없었다.


대표가 원하는 성과는 확장이었다. 규모를 늘리고 매출을 늘리고 수익을 늘리는 것. 그러려면 새 지점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했다.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매물을 보고 수익률을 계산하고 건물주와 전 세입자와 협상을 하는 일들. C와 S가 새 지점 확장 업무를 맡았다. H는 고객 관리, 시설 관리 업무를 나와 나누고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가끔 지점 확장 업무를 서포트했다.


지점 확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나머지 모든 일은 나에게 넘어왔다. 혼자서 100명 넘는 고객들의 계약 관리며, 입퇴실 시점에 맞춰 방을 세팅하고 또 정리하는 것, 신규 고객 신청이 들어오면 직접 한 명씩 연락해 투어일정을 잡고 투어를 진행했다. '변기가 막혔어요', '수압이 너무 약해요.' '보일러가 고장났어요' '인터넷이 안 돼요' 하루에도 몇 건씩 민원을 처리했다. 입주민마다 매달 월세가 제때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퇴실 시 보증금을 정산해서 환급하는 것, 각종 비용 처리를 포함한 통장 내역 관리도 내 업무였다. 법인세, 부가세 신고 시즌에는 세무사 사무소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것까지. 그런 와중에 추가 업무도 늘 있었다. 지원사업의 지원서 작성이나 전단지 붙이기. 운영하는 공간의 개선안을 만들라고 하거나 내년도 예산안 작성, 수익률 개선방안 도출 같은 절대적인 시간 여유가 필요한 일들까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밀려들어왔고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자주 실수를 했고 대부분 마감기한을 못 지켰으며 공유한 결과물은 한번에 통과된 적이 없었다.






새 지점 확장은 생각보다 빨리 되지 않았다. 그동안 "한 명은 나가야 한다"는 메세지는 미팅마다 계속 언급되었고 내 머릿속에서도 경고등처럼 깜빡거렸다.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몇 달째 협박이 이어지자 불안함에 떨던 나는 책을 샀다. 다 아는 이야기만 하는 자기계발서를 사람들이 도대체 왜 사는 건지 이해를 못했던 내가 자기계발서를 줄줄이 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책들 중에 하나라도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며.


<나는 왜 항상 시간에 쫓길까?> <일 처리가 빠른 사람들의 시간 관리 비밀> <3개월 사용법이 인생을 바꾼다>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신의 시간술> <적게 일하고 잘 사는 기술> ...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지, 어떻게 하면 일하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 수 있을지, 읽고 또 읽었다. 일고여덟 권을 내리 읽으니 다들 비슷한 얘기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첫째, 새벽 시간을 활용하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양과 질을 늘릴 수 있다고 해서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일을 했다. 둘째,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휴식과 환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일어나서 3-4시간 일한 후 30분 이내로 쪽잠을 자고 출근했다. 점심을 먹은 뒤엔 10분이라도 주변을 산책했다. 저녁에는 수영을 하고 집에 가서 다시 남은 일을 처리했다. 셋째, 쓸데없는 행동과 생각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원천 차단하라고 해서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점심에는 어제 먹었던 메뉴를 다시 먹었다. 그리고 더 단순한 팁도 있었다. 보폭을 크게 해서 뛰다시피 걸으라거나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해 일을 하라거나.


시키는 일은 기를 쓰고 어떻게든 해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배달 전화 거는 것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내가 하루 수십 통 콜드콜을 걸었고 죽기보다 하기 싫은 거짓말도 했다. 좋은 게 좋은 내가 아빠만큼 나이가 많은 거래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같이 일 못 한다."는 협박도 했다.






어느 금요일, 아침부터 투어가 연이어 잡혀있었고 동시에 투어하는 지점에 고장난 게 있어 수리 기사님을 불러두었다. 투어 사이 사이에는 퇴실한 방을 확인하고 스페어키가 없는 호실의 열쇠를 복사해두어야 했다. 오전에 출근해서 투어를 몇 개 해치우고 퇴실한 방들을 확인하고 다음 투어 전에 빨리 점심을 먹으러 근처 서브웨이에 갔다. 샌드위치를 입에 넣는데 퍽퍽해서 그런가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 사이에 투어신청한 사람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서 몇 입 먹지 못하고 포장해서 자리를 떴다.


투어를 하고 나서 갑자기 속이 안 좋은 걸 느꼈다. 목구멍이 마르고 어지러웠다. 이마를 짚어봤더니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쳐내야하는 일이 많은데 이 상태로는 힘들 것 같았다. 병원에 갔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가까운 지점에 있던 S에게 와달라고 했다. 내가 병원에 가 있을 동안 해야할 일을 S에게 설명하고 병원으로 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도 걸어가는 게 힘겨웠다.


병원에서는 열이 너무 심하다고 독감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검사 결과 독감은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은 독감도 아니고 감기도 아닌데 이렇게 고열이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일단은 수액을 맞고 가라고 해서 잠깐 누워있다 가기로 했다. 삼십 분 정도 걸린다고 해서 잠깐 눈을 붙이려했다. 잠이 들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지점에서 화장실 공사를 하고 있던 수리 기사님이었다. 잠깐 와줄 수 있냐고. S가 대신 갈 거라고 하고 S에게 전화해 가보라고 했다. 조금 있다 투어 신청자의 문의 문자. 조금 있으니 퇴실 처리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는 S의 전화. 그 다음은 열쇠 복사집 사장님. C의 전화. 고객 문의 전화... 삼십분 누워있는 동안 전화를 스무 통 받았다.


잠은 못 잤지만 수액을 맞아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다시 지점으로 돌아갔다. S는 그만 퇴근하라고 했는데 할 일이 남아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나한테 전화가 걸려올 거였고 다른 사람들도 해야할 일이 있었는데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투어는 7시. 그것까지만 마치면 집에 갈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예정된 투어를 하면서 밀린 업무를 했다.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열이 더 나는 것 같았다. 속은 안 좋고 어지럽고 추웠다. 다행히 빈 방이 있어서 거기에 들어가서 잠깐 누웠다.


마지막 투어 신청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가까워올수록 속이 울렁거렸다. 1분 1초가 길게 느껴지는 와중에 하필이면 투어 신청자가 20분이나 늦었다. 안 좋은 속을 누르고 투어를 겨우 마쳤다. 투어 멘트의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는 거의 토할 뻔 했다. 목례만 겨우 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토하진 않았다. 하긴 나올 것도 없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금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일요일, C에게 전화가 와서 필요하다면 월요일에 쉬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주말 동안 쉬었고 괜찮아졌으니 나가겠다고 했다. 월요일에 쉰다고 해도 전화는 끝없이 올테고 화요일에 마주해야 할 밀린 업무가 더 겁났다.


그 후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갑자기 고열에 쓰러지는 일이 두 번 더 있었다.







그 해 봄, H가 돌연 퇴사 선언을 했다.







이전 09화 합병을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