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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Oct 18. 2021

내가 만든 회사를 내 발로 나왔다

직원을 쫓아내는 회사의 특징

H의 퇴사 선언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H가 '너무 힘들고,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팀에 짐만 되는 것 같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 충격이었다. 뭐든 잘 해내는 H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니 말도 안 돼. 그리고 의문이 싹텄다. '이거 가스라이팅인가?'


의문을 품고 모든 상황을 바라보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직원들을 믿지 못했다.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만 봤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길 원했다. 그러면서 회사에서 하는 일은 언제나 암암리에 소수의 이너서클에게만 공유되었다.


일하는 동안 매일 업무 보고를 했다. 오늘 하루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내일 할 일을 시간대별로 미리 보고했다. 보고용 스케줄을 작성하고 있으면 퇴근 시간이 한 시간은 늦어졌다. 그마저도 C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일 업무 중에 전화가 왔다. 지금 하는 일 멈추고 오늘 계획부터 다시 짜서 공유하라고. 그러면 일이 또 늦어졌다. 계획한 일 중 오늘 끝내지 못한 일들이 있으면 오늘 안에 끝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다. 그러다보면 또 퇴근이 늦어졌다.


말해봐야 바뀌는 게 없었다. 그곳에서는 권위만이 변화를 만들었다. 들을 준비가 된 상대여야 서로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갈텐데 그런 게 불가능했다.


업무량은 줄어들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꾸역꾸역 해나가다가 도저히 너무 힘들어서 사람을 뽑아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을 뽑아서 그 사람이 내 일을 덜어가면 그 시간 동안 나는 뭘 할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논의는 없었다. 몇 달 후 대표가 추가 인력을 한 명 뽑으라고 했고 곧바로 채용 프로세스가 진행되었다. 두 번의 긴 회의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새 팀원의 업무 범위와 자격요건을 정하고 채용 공고를 올렸다. 채용 공고를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C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채용 공고의 내용이 대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게 채용 공고는 우리가 회의한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변경되었다.


상황은 정상 참작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결과만이 중요했다. 대표의 지시로 공기청정기를 주문한 적이 있었다. 미세먼지가 갑자기 심해진 때여서 공기청정기 수급에 문제가 있었다. 2주는 기본으로 걸린다고 했고 대표에게 그렇게 전하자 '안 되면 되게 하라'면서 다른 업체에도 다 다시 연락해보라고 했다. 그중 한 업체에서 조금 더 이른 일정으로 수급해준다고 했고 대표는 '그거 봐라'고 의기양양해 하며 계약을 하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가 되었는데 공기청정기는 오지 않았다. 연락해보니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본사 스케줄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고 했다. 본사 스케줄 때문에 전체 주문이 다 밀리고 있다는데도 대표는 계속 전화해서 독촉하라고 했다. 그렇게 3번 정도 더 약속한 일정이 뒤로 밀렸고 처음 알아봤던 다른 업체들에서 얘기하던 것과 비슷한 스케줄로 공기청정기가 도착했다. 그리고 C는 '공기청정기 설치가 늦어진 건 네 탓이 아니라고 치자'며 인심쓰듯 이야기했다.






H의 퇴사 선언에서 시작된 의문은 3개월쯤 지나자 확신이 되었다. 이 회사에서 사람은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속쯤으로 취급되었다. 대표나 관리 업무를 하던 C 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함께 일했던 다른 팀원들은 그렇게 느꼈다.


내가 아니라 이 조직이 문제라는 걸 명확히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나간다고 하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없었다. 커리어 전환을 위해 데이터 분석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는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아 몇 달째 제자리 걸음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비슷한 공유주거 서비스의 매니저뿐이었다.


나는 단자리 수의 보잘것 없는 지분을 가졌기 때문에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개미 주주였다. 회사에서 나에게 준 건 '주주로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하라는 압박 뿐이었지만 내가 만든 내 새끼같은 회사를 쉽게 떠날 수는 없었다. 회사 이름도 내가 만들었고 통장도 내가 만들었고 이 시스템과 모든 파일들을 내가 만들었는데 어떻게?


나는 너무 열심히 일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사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재밌는 일을 하는 사람이고 즐겁게 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나에게 열심히 산다고 말했던 것도 같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창업을 했을 때는 열심히 일해도 괜찮았다. 하루 종일 몸을 쓰는 일을 해도, 하우스 오픈 준비로 몇 주 동안 매일 같이 밤낮없이 일해도 마음이 녹다운된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 월급 받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일하기 시작하자 반년도 되지 않아서 망가졌다. 몸과 마음 모두.


내 서비스니까 열심히 일하는 나는 채찍질 하면 할수록 더 빨리 달리는 말이 되었다. 상처가 얼마나 나고 피가 얼마나 흐르든 간에 인정받고 싶어서 더 달렸고 아무리 달려도 채찍만 돌아오는 상황에 좌절했다. 어느 순간 나는 너무 지쳤다.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서는 나라는 개인의 넥스트 스텝이 보이지 않았다. 내 한 몸 이렇게 갈아넣어 회사가 성장하고 성취를 맛볼 수는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돌아올 보상에 비해 내가 감내해야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나는 해볼만큼 해봤다. 마침 정부기관에서 진행하는 데이터분석가 양성사업 공고가 떴고, 지원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다.


그렇게 나는 내가 만든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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