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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보드가 소모품이라지만

ep.20

by 채민주

마시멜로우라는 포인트에 처음 갔던 날이었다. 들어간 지 30분 정도 지났나, 패들을 하려고 보드에 누웠는데 보드가 엄청 흔들흔들 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 쎄함이 스쳐지나갔고 보드를 뒤집어 보니 있어야 할 핀이 사라져 있었다. 그 넓고 깊은 바다 어딘가에 가라앉고 있을 터였다. 일단 해변으로 나갔는데 앞으로 잘 가지지도 않았다. 겨우 나가서 핀을 빌려 끼고 다시 라인업으로 들어갔다.

참 신기하게도 핀을 제물로 바쳐서 그런가 그 이후부터 재밌는 파도를 계속 잡아 탔다. (아닌 거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덜 아프다.) 산 지 얼마 안 된 새 핀이 그렇게 홀랑 사라져 버려서 속상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행히 샨이 핀을 빌려준다고 해서 고맙단 얘기를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마시멜로우에서 핀도 해먹고, 나중에 살펴보니 보드에 딩도 나있었다. 스리랑카 도착하자마자 보드가 깨져서 오더니만… 며칠 뒤에 사람 못 피해서 한 번 더 해먹었다. 심지어 안전하게 잘 타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렌탈했던 보드가 망가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 그건 땅에 놔뒀을 때 누가 밟고 지나갔던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스리랑카에 지내면서 다른 사람 핀에 썰려서 보드 앞 부분을 날려 먹은 분, 보관소에 세워 둔 보드가 쓰러져서 해먹은 분 등등 여러 예시를 봐서 그런지 외롭지는 않았다. 사고를 쳐도 같이 친 기분이랄까.


사실 지금 내 보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색깔도 그렇고 무겁기도 하고. 보드 자체는 예쁜데 나랑 찰떡이라는 느낌은 없다. 그래서 딩이 나도 보드가 망가졌다는 사실에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아마 애정이 가득한 보드였다면 슬픔을 가득 머금고 있었을 것 같다. 아니면 애지중지 다루느라 딩이 안 났을지도.


무튼, 주인이 서툴러서 네가 고생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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