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죽었다. (27)
여기서 죽었다. (27)
어둠 속에서 빛과 함께 나타난 아이는 여기를 분명히 살인 현장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귀를 의심했지만…
아이는 그 또래 애들과는 다르게 또릿또릿 하게 말했었다.
“잠시만… 뭐라고?
여기가 살인 현장이라고?”
해주는 대답 대신 여전히 건조한 눈빛으로 김 회장을 쳐다보았다.
“여기 뭐 하러 오신 거예요? 형사 아니죠?”
“어… 형사는 아니고… 아저씨는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여기 왔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네가 살인 현장이라고 말했어.
맞지?”
“네 맞아요. 그런데 뭐 찾으러 왔는데요?
혹시 찾는 게 이런 거예요?”
해주는 주머니에서 빨간 헤어핀을 꺼내 김 회장에게 보여 주었다.
작년 연지 생일날 김 회장이 사준 에르메스 헤어핀이었다.
그 핀은 김 회장이 연지한테 사준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연지의 헤어핀이었다.
“너 이거 어디서 … 난 거야?
김 회장은 이 아이가 어쩌면 살인 현장의 목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주는 대답 대신 방금 전 여기서 주은 연지의 헤어핀을 김 회장에게 건네주고 발길을 돌렸다.
“잠시만… 잠깐만….”
얼떨결에 해주의 팔을 붙잡은 김 회장은 이 아이를 어떤 말로 못 가게 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만… 잠시만… 얘기 좀 하자…
여기서 누가 죽는 것을 보았니?”
해주는 대답대신 고객을 가로저었다.
“아니 네가 여기가 살인 현장이라는 했잖아.
말을 좀 해 주면 안 될까?
며칠 전 이 동네에 여행 왔다가 죽은 여자가 사실 내 딸이야.
그리고 네가 주은 머리핀은 내 딸 것이 틀림없고….
제발 부탁인데…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줄래?”
간절히 애원하는 김 회장 뒤에 커다란 무엇이 있는 것을 발견한 해주는 이제야 김 회장의 눈을 바로 보며 얘기했다.
“아저씨 딸… 연지 누나 알아요.”
“어떻게 아는데?
아… 한옥스테이가 너네 집이구나?”
“아뇨. 친구 이모집이에요. 방학이라 놀러 왔어요.
“연지도 한옥스테이에 묵었다고 했는데… 연지를 본 적이 있었겠네?”
“네… 연지 누나하고 친하게 지냈어요.”
“그랬구나.. 그럼.. 이제부터 연지가 죽은 것에 대해 말해 줄래?”
김 회장은 최대한 궁금함을 참고 마치 유리공 저글링을 하듯이 초집중하여 아이의 말을 유도했다.
“그런데 아저씨…
저기 뒤에 있는 덩치 아저씨들이 아저씨 부하들 맞죠?
다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면 안 돼요?”
김 회장은 꼬마의 요구가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성을 포함한 모든 부하 직원들을 폐건물 밖으로 나가게 했다.
그리고 여기가 어쩌면 연지가 죽은 진짜 현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들었기 때문에 수행 직원들에게 폐가 주변을 함부로 다니지 말고 타이어 자국과 신발 자국을 찾아, 측정 가능하게 담배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으라고 지시했다.
다시 해주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 김 회장에게 해주는 정신 잃은 연지가 킬러에 의해 들쳐 업혀 여기 들어오는 과정과 비닐이 덮여 있었던 철재 테이블을 지목하고, 거기에 누워 칼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 그리고 비닐에 구멍을 뚫어 피를 제거하는 모습 또 비닐에 돌돌 말려 실려 나가는 모습등 아주 상세히 설명했다.
김 회장은 이토록 잔인한 얘기를 눈 하나 꼼짝 안 하고 태연하게 말하는 해주를 보니 혹시 이 아이가 살인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처럼 해주가 말한 살인 현장의 디테일은 한 편의 공포영화처럼 섬세하고 무서웠다.
해주는 사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서 지금 이곳 폐건물까지 걸어오게 되었고
어둠에 익숙해지자 바로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철재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리고 철재 테이블을 만지는 순간, 갑자기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었다.
희미한 실루엣의 비옷을 입은 사람이 테이블에 누워있는 여자의 옆구리에 박혀있는 칼을 뽑았을 때 살인자의 얼굴이 뿜어 나오는 피와 오버랩되어 칼날의 빛에 살짝 비쳤었다.
살인자의 얼굴을 본 것은 그것이 다였다.
고개를 돌려 아래에 숨어있는 반짝이는 것을 주었었는데 머리핀이었다.
그러다 마침 폐건물에 누가 들어온 것이 김 회장이었던 것이었다.
“미안한데… 혹시 너… 귀신이 보이니?
그러니까 내 딸이… 지금 네 옆에서 말을 하는 거야?”
김 회장은 해주가 말한 살인 현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어떻게 이 어린아이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혹시 무속의 힘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지?
마치 네가 살인범인 것처럼…
기절한 연지를 저 철재 테이블에 누여서 칼로 죽였다.
그러고 나서 바닥에 깔린 비닐에 구멍을 뚫어 피를 하수구에 버렸다.
그리고 비닐째 감아 질질 끌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이런 말을 보지도 않고 할 수 있지?”
해주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대화하는 방법을 엄마와 연습한 적이 없었다.
김 회장은 대답 없는 해주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해주가 말한 살해 현장을 자세히 보았다.
철재 테이블부터 철문 입구까지 오래된 먼지가 쓸려 출구까지 이어진 흔적이 있었다.
그 흔적은 마치 싸리빗자루질을 약하게 한 듯 오래된 빗살무늬 토기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아마도 시신을 비닐에 말아 끌고 나올 때 먼지가 쓸린 것 같았다.
김 회장은 이번에는 하수구에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말라서 먼지만 나와야 하는 하수구 속은 의외로 축축했으며, 밀가루인지 석회 가루인지 분간이 안 되는 흰 가루가 묻어 나왔다.
범인은 시신을 가볍게 해서 이동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하수구에다 피를 빼고 거기에 가루를 뿌린 것이었다.
‘이 꼬마의 말은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연지는 여기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