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날의 기록
뒤늦게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방학이 시작하면서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휴가도 나들이도 단념하고 줄곧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차였다. 방학을 일주일 가량 남기고 아이들이, 사실은 나와 남편이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어디든 다녀오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신나서 방방거렸다. 어디든 괜찮다고 했지만 탁 트인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넓고 먼 시야를 자랑하는 바다로 가자. 여름에는 바다고 해변 아니겠어. 우리 부부는 결연히 결정을 하고서 이틀에 걸쳐 줄기차게 인터넷 검색을 했다. 거리두기 4단계가 무색하게 빈 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꽤나 비싼 가격이거나 좁고 낡아 보이는 곳만 남아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룻밤에 40만 원 가까이하는 서해안 바닷가 펜션을 예약하게 되었다. 대신 사진상으로는 방이 깔끔해 보이고 스파시설이 구비되어 있으며 바다가 보이는 4층이라 경치도 좋을 거라는 사실로 위안 삼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변산반도였다. 몇 년 전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왔던 곳이다. 그때는 리조트 안에서 주로 머무느라 주변을 돌아보진 못했었다. 둘째는 작년까지만 해도 차멀미가 심했다. 크면서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작년만 해도 한 시간쯤 지나면 불편을 호소하며 칭얼대거나 항의하곤 했다. 3시간가량 이동해야 해서 출발 전에 살짝 긴장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아이들 컨디션이 좋았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서 쉬었다 가니 시간은 더 걸렸어도 마음은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변산반도 고사포 해수욕장. 좀 더 유명하고 큰 변산 해수욕장에서 3km 거리로 떨어져 있다. 규모는 변산해수욕장에 비해 작지만 둥그런 모래사장은 깨끗했고 파도도 정겹게 움직여서 아이들이 놀기에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해변가와 딱 붙어있는 펜션도 하나 있었는데, 다음에는 여기 묵으면서 바다에서 실컷 놀아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도 멀지 않아서 이틀에 걸쳐 이곳에서 여러 시간을 보냈다.
휴가를 떠나왔다는 설레임으로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멀리 수평선을 응시했다. 여기부터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풍경. 두 눈동자를 맑은 바닷물에 헹구고 내 마음을 구름 곁에 널어두는 시간. 잔잔한 파도가 발목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었다. 자연물로 둘러싸여 있노라면 어른도 아이도 그저 하나의 생명체로 동등해지는 것 같다. 바다 앞에서는 다들 비슷한 모습이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바다의 가장자리를 따라 모래사장을 거닌다. 발을 담그며 파도와 술래잡기를 하면서 까르르 소리친다. 다들 미소 짓고 안도하는 모습에 휴가가 실감 나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녁이 되면서 바다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 썰물 때가 된 것이다. 바닷물이 꽁무니를 감추며 빠져나가자 갯벌이 넓게 펼쳐졌다. 깊은 바닥에 감춰있던 바닷속 비밀들이 드러났다. 여러 모양의 조개, 크기가 다른 꽃게들, 새끼 망둥어 등 갖가지 생명체들이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쉽게도 서해안을 가면서도 갯벌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장화, 양동이, 호미(또는 삽) 등이 있다면 더욱 신나게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근처에 빌려주는 가게가 있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눈으로만 구경하고 들어가 쉬기로 했다.
어둠이 깔린 바닥 위로 불빛이 둥둥 떠다녔다. 여러 일행들이 헤드 랜턴을 쓰고 갯벌 이곳저곳에서 조개잡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꽃게들을 관찰하고 여러 크기의 조개도 찾아보았다. 작디작은 것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멀리서 보면 우리도 역시 갯벌 위의 작은 생명체였을 것 같다.
다음날 오전에는 호우주의보가 발효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부안 청자박물관을 구경하러 갔지만 휴관이었다. 알고 보니 몇 주전 관광객 중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여 이 근방이 한동안 뒤숭숭했다고 한다. 그 여파로 실내 관광지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고 했다. 고려의 보물들을 볼 수 있다고 기대하던 아이들이 잠시 아쉬워했다. 다행히 오후에는 날이 개어 후텁지근한 여름의 막바지 열기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펜션 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쫓아냈다. 수영장에서도 마스크 쓰는 건 어색하고 이상스러운 기분이었지만 이렇게라도 놀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여행의 시간은 숨 가쁘게 지나갔다. 돌아오는 날에는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근처 변산 해수욕장을 들러보았다. 고사포해수욕장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주변에 상가도 여러 개 있었다. 같은 바다인데 같은 해수욕장인데 바다의 얼굴은 꽤 달라 보였다. 비가 많이 온 다음날이라 그랬던 건지 다른 곳이라 그런 건지 변산의 파도는 매우 우렁차게 움직이며 세찬 소리를 냈다. 밀려오는 파도 바로 앞에 있으니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파도풀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좋아했고 튜브를 빌려 타고 신나게 놀았다. 넘실대는 파도를 껑충 뛰어넘기도 하고 포말에 함께 휩쓸려 모래사장으로 밀려 들어오기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해변의 중간에는 웬일인지 높다란 모래언덕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 일부러 그렇게 조성해준 거였다. 모래언덕 위에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며 놀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근처 가게에서 썰매를 2천 원에 빌릴 수 있었다. 기대만큼 빠른 속도감을 느낄 순 없었지만 (이는 나의 몸무게 때문일 듯하다) 어느새 아이들이 몰리며 다들 충분히 스릴 넘치게 타고 있었다. ‘8월의 썰매'라는 신박한 아이디어는 해변가에 놀러 온 여러 사람에게 들뜸을 선물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낮의 시간을 내내 모래 위에서 보냈다. 저녁때가 가까워서야 아이들을 구슬려 간신히 차에 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는 한가했고 주변은 곧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뒷자리에서 아이들은 지쳐 잠들었다. 나도 노곤한 몸으로 나지막이 숨을 고르며 잠시의 고요함에 빠졌다. 휴가 중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특별할 거 없지만 특별한 시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다.
선크림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햇살에 달궈져 살갗들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동안 어깨와 팔, 다리에 가득 담아온 바닷가 열기를 달래며 휴가의 시간들을 진하게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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