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아이 배웅을 핑계 삼아 잠깐의 산책을 나선다. 현관을 열면 십도 이상 차가운 아침 공기가 훅 들어온다. 아직 잠에 취해 있던 찌뿌둥한 몸이 잠시 놀란다. 건물을 나서면 그때부터는 진짜 밖이다. 집을 벗어난 바깥의 공기, 바깥의 풍경.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밤새 굳어있던 마음 근육이 풀어지는 듯하다.
가을이란 계절에 어울리는 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정신을 깨운다. 아파트가 삭막하다고 정이 없다고 종종 말하지만, 도시에서 아파트 단지만큼 나무가 울창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사방으로 단풍이 널려 있다. 불그레 발그레 서로 얼굴을 붉히는 사이처럼 나무들의 쑥스러움이 느껴진다. 가만히 보니 나무마다 제각기 다른 색감을 입었다. 그중 유난히 곱게 물든 나무도 있다.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 보아도 이건 잎사귀가 아닌 것 같고 실물이 아닌 것만 같다. 물감 번진 얇은 종이들을 흔들리나 싶다. 내 눈을 액자 삼아 자신을 감상해주길 기다리는 그림인가 싶다.
“엄마, 진짜 예쁜 색 나무도 있어.”
“응 예쁘네. 한 철이라 더 그러네.”
그래, 너도 보았구나. 공단같이 고운 풍경을 딸아이와 함께 눈에 주워담는다.
건널목에 다다르니 시니어봉사단 분이 계셔서 눈인사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녹색등이 켜진다. 나는 건너지 않고 그대로 서서 잘 다녀오라고 아이 등을 두들겨 주며 인사한다. 아이는 대답을 하곤 손을 흔들어 보이며 앞으로 간다. 아이가 길을 다 건너는 것을 보고 돌아서려는데 봉사 중이던 할머님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딸 하나예요?
열두 살인 다 큰 녀석을 건널목까지 배웅하니 애지중지하는 듯 보였을까. 혹 당신의 예전 모습이 떠올라 반가움을 내비치셨는지도.
유난히 고운 잎사귀가 내게만 보인 건 아니었을 거다. 내게만 있는 건 더욱이 아니겠다. 지나온 만추의 풍경을 다 알고 있는듯한 할머니의 눈빛은 가을 햇살과 같은 온도로 비춘다.
-아녜요, 집에 또 있어요.
대답하고 보니 등교 안 하는 날이라고 아직 눈 딱 붙이고 자는 둘째가 생각났다.
이크 이러다 늦겠네…깨우러 가야지. 아직 아침임무가 끝나지 않았구나.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돌아서며 종종걸음을 친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뿐이지 온라인 수업에 참여해야 하고 시작시각은 똑같이 9시이다. 두 발은 헐레벌떡 집으로 향하지만, 사방 고운 빛깔에 순간순간 시선을 빼앗긴다. 지나가는 모습이라 예쁘고 설레고 아깝다.
아이들의 여러 빛깔의 모습이 지나쳐간다. 풋풋함과 서투름과 투정들이 지나가고 있다. 한 철이라 더욱 곱고 아쉽다. 한때를 채우는 오늘 하루를 더 선명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된다.
내게는 유난히 고운 잎사귀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좀 전에 인사하며 학교에 보냈고, 이제 다른 하나를 만나러 간다. 양손에 보물을 쥔 것처럼 호사스런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