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조업 분야의 회사의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품질'과 '납기'이다.
'품질'은 다른 경쟁사보다 튼튼하고 안전한 제품을 생산하라는 것이고, '납기'는 다른 경쟁사보다 더 빠른 시일 안에 제품을 생산하라는 것이다. 이 중에 어느 것도 우선순위에 밀리지 않는다. 즉, 둘 다 잘하라는 말이다.
나와 내 동료들은 품질과 납기를 동시에 지키라는 말을 두고 바보 같은 소리라 생각했다.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당연히 시간이 더 필요하고, 빠른 시일 내에 제품을 만들려면 그만큼 검증에 쓰이는 시간이 줄어서 품질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품질과 납기는 동시에 지킬 수 없는 창과 방패, 다시 말해 제로섬 게임 같은 존재인데 이를 모르는 윗사람들이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둘 다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엔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지만 우리 회사는 여전히 사람을 갈아 넣어 이 둘을 지키려 해 왔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면 안 될 게 없다는 마인드였다. 당장에야 어찌어찌 굴러가겠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나아가다간 과부하가 걸린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회사와 멀어져 전쟁 같은 육아에 매일 임하고 있는 오늘날, 나는 이 회사의 말도 안 되는 과부하 정책이 육아에도 통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론이 길었지만 나는 바로, 아이를 키우면서 동시에 지킬 수 없는 수많은 조언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과부하가 걸린 엄마의 모습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삐뽀삐뽀 119 이유식>에서 저자 하정훈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들어간 이유식이 아기에게 제일 좋습니다.'라고.
그런가 하면 국민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아기에게 화가 나도 부모는 항상 부모의 위치에서 아기를 대해야 합니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훈육을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둘 중 하나야 지키는 게 어렵진 않겠지만, 어떤 상황에선 저 두 조언이 앞서 말한 창과 방패가 되어버린다.
우리 덕순이는 이유식을 잘 먹지 않는 아기다. 정성스럽게 우린 채수와 1++등급 한우, 유기농 야채와 쌀을 함께 끓인 나름 최고급 이유식을 날마다 대접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오열하고 수저에 떠준 밥을 손으로 잡아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도 모자라 밥이 묻은 손으로 온 얼굴을 다 문질렀다.
나는 부족한 엄마라 덕순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쉬지도 못하고 만든 내 정성과 사랑이 모두 무시받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어르고 달래면서 먹였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을 땐 내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용암이 끓어올라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야 너 장난해?!"
나도 모르게 그만 덕순이에게 소리를 질렀었다. 덕순이는 짜증을 내다 내 호통에 깜짝 놀래 눈이 동그래져서 날 쳐다보더니 이내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사랑과 정성을 다해 이유식을 만들었으니 하정훈 선생님의 말은 지켰지만 부모의 위치에서 아이를 대하지 못했으니 오은영 박사님의 말은 지키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으로 지친 내 친구는 나에게 시판 이유식을 추천했다.
이유식을 만드는데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아기에게 더 신경을 쓸 수 있고 아기가 설령 이유식을 안 먹더라도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게 아니니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기가 거부하면 쿨하게 내려놓을 수도 있으니 아기와 엄마 서로에게 더 좋은 일이란 것이었다.
실제로 내 친구는 이유식을 만들고 먹이는데 고생하는 대신 시판 이유식을 사 먹이면서 육아의 질이 훨씬 더 좋아진 듯했다. 오은영 박사님의 말대로 아기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좋은 엄마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는 하정훈 선생님이 말하는 좋은 엄마는 되지 못했다.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이유식이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 간편하게 데워 먹이면 되는 이유식을 먹였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말하는 '좋은 엄마'가 되려면 열심히 노력해서 이유식을 만들고 아기가 식사를 거부하고 밥을 모두 패대기 치더라도 화를 내면 안 된다.
'좋은 엄마'의 조건이 두 가지뿐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조건들은 수백, 수천, 수만 가지다. 이쯤 되면 과연 '좋은 엄마'는 실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유니콘 같은 존재인가 회의감이 든다.
어릴 때 읽은 우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신하가 임금의 명령으로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성 안을 걸어야 했다. 임금이 말하길, 물을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신하는 행여나 물이 흐를까 조심조심하며 성 안을 걸어 다시 임금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걷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
임금의 질문에 신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이 흐를까 신경을 잔뜩 쓰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들에게 육아란, 물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성 안을 걸으며 계단과 창문과 촛불이 몇 개인지 세는 것과 같다. 사소한 임무들이 하나 둘 모여 동시에 다 하기엔 너무 버거운 일이 되어버린다. 셈에만 집중하다가는 물이 흘러넘칠 테고 물을 쏟지 않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면 도무지 주변을 둘러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다 해낸다 해도 그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다.
엄마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오히려 못해낸 일들에 비난받기 일쑤다. 나는 아이에게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어른답지 못하게 화를 낸 부족한 엄마이고, 내 친구는 아이에게 직접 이유식을 만들어주지 않은 부족한 엄마가 된다.
우리 K-엄마들은 마치 품질과 납기를 모두 지키기 위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우리 회사의 가엾은 연구원들처럼 이 한 몸 갈아 넣어 육아의 모든 임무들을 완수한다.본인의 몸이 과부하가 걸려 상하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말이다.
"이게 뭐가 어려워? 그냥 하면 되잖아."
엄마 주변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보기엔 육아의 수많은 과제들 중 하나쯤이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에 상처도 쉽게 주곤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는다. 남들이 보는 나의 일과는 육아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그 밖의 수많은 일들을 설명하는 것이 몹시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육아에 과부하가 걸린 엄마들에게 무심코 상처를 주지 않도록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한다.물이 가득 담긴 컵을 들고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아야 하는 엄마들의 고단함을 이해한다면, 설령 엄마가 그중에 하나를 빠트리더라도 그 누구도 차마 엄마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본인의 한 몸 갈아 넣어 수많은 임무들을 동시에 해내고 있는우리 회사 연구원들과 모든 엄마들에게 심심치 않은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