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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씨 Mar 01. 2022

불안할 때 나는 ‘걷는다’

믿을 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내 두 다리뿐이니

2019년 겨울 우울증에 걸렸을 때도, 2021년 봄 불안장애가 덮쳤을 때도 내 일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걷기’였다.

낮에 짬을 내서, 퇴근해서는 저녁도 먹지 않고 네다섯 시간을 걸어 다녔는데 거의 거르지 않았다. 걷기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어서였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우울한 생각, 불안감, 그리고 눈물이 찾아왔다.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없는 힘을 짜내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옷을 입고 나가 내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밤이 일찍 찾아왔다. 먹고 싶지 않은 밥을 억지로 밀어 넣고 밖에 나가면 새하얀 입김이 나오고, 시린 냉기가 얼굴을 감쌌다. 집에서 5분 거리에 한강 공원이 있다. 육교를 건너 강변에 닿으면 사람들이 많이 걷는 산책로를 피해 가로등조차 없던 어둑한 강 바로 옆 오솔길로 들어섰다. 사람들을 마주치면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어서 싫었고,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감출 힘도 없어서였다. 간간이 낚시꾼 몇 명만 앉아 있는 어두운 길을 걸었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온갖 생각들에 잠식되어 그저 다리를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아무도 없는 까만 길 한복판에서 정신이 문득 들었다. 새벽 1시 밤길에 혼자 있는 나를 인지하면 그제야 무서움이 올라왔고, 가로등이 켜진 산책로 쪽으로 거슬러 올라와 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매일 몸을 혹사시켜 지쳐서라도 잠들 수 있었다.


봄에도 마찬가지였다. 불안장애가 왔을 때는 약간의 공황발작 증상도 있었기 때문에 걷는 것이  힘들었다. 30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1시간을 걸려 걸었다. 날이 따뜻해지자 한강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속에서 조금만 몸이 힘들어져도 심장이 마구 뛰고 숨이 가빠오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저앉아 있으면 돗자리를 깔고 치킨을 먹으며 깔깔 웃는 연인과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언제  시절로 돌아갈  있을까, 아니 돌아갈 수는 있긴 할까 하는 생각에 자주 울었다. 그때 걷기 위한 준비물은 핸드폰, 에어팟 프로, 그리고 눈물을 닦을 휴지  장이었다. 버틸 수가 없어 휴가를 내고   동안 내려와 있던 부산에서도 많은 시간을 걸었다. 주로 엄마와 함께 걸었는데, 엄마 나는  이럴까, 죽고 싶어, 미치겠어하는, 평소에는 꺼내지 못할 말들을 두서없이 쏟아내며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2022년 돌아온 겨울, 지금의 나는 무척이나 건강하고, 게을러져 셔 소파 위 전기장판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다 ‘나가야 되는데’만 반복하다 잠이 든다. 애플 워치의 움직이기 링 400kcal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집 근처를 쉬엄쉬엄 걷다가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큰 마음을 먹고 어느새 낯설어져 버린 한강변을 걷는 것이 요즘 내 걷는 일상이다. 절대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지난한 시간을 걸어내고, 어느새 그토록 바라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이유 없이 울지도 않으며, 부정적인 생각들에 근거 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고 우울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기분과 건강을 위해 걷기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걷기에 나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나아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좋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안다. 그중에서도 크게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걷기는 완벽하다. 하지만 걷는 것에 붙일 수 있는 장점들을 따지기에 앞서, 힘들 때 한번 걸어보았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힘들면 집 밖에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갇힌 공간을 나와 두 다리를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걷기는 해 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쉬운 시도다. 무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 때는 좀 무리해도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속에 쌓인 생각들을 덜어낼 수 있다면, 쉬이 오지 않던 잠을 지쳐서라도 잘 수 있다면.


걷는다고 모든 잡념들이 일순간에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다리와 동시에, 머릿속에는 우울한, 불안한, 짜증 나는 생각들 역시 부지런하게 끊임없이 밀려온다. 하지만 밖에서 신선한(혹은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바뀌어 가는 낮과 밤, 봄-여름-가을-겨울을 체감하다 보면 깊고 깊었던 생각의 늪에서 조금은 빠져나올 수 있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현재,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내 발에 집중하다 보면 그냥 그렇게 된다. 산책로 양 옆에 핀 꽃들이 계절마다 바뀌는 것을 보면, 어두운 밤 밝게 빛나는 달과 꽤 많아 셀 수 없는 별들을 보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사람이 없는 곳에서 가끔 소리 내어 부르기도 하면 더 좋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고민에 대한 답도 찾았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애정도 쌓아가게 되었으며,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일상의 루틴을 찾았다는 안도감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으로든 힘든 상황에서 무엇보다 확실한 탈출구를 찾는다면 나는 걷는 것을 추천하겠다.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도, 느려서 답답하고 불안할 지라도,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출구를 찾아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온전히 나의 몸만으로도 할 수 있는 가장 가볍고도 확실한 한 걸음을 옮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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