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돌보는 디저트여행기 외전 by.OV5
에필로그를 위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들’에 대해 써보았다.
오랜 시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단단하게 나의 삶을 지지해준 행복의 순간들을 리스트로 적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안도감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아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견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마치 갓 태어난 아기를 보듯이 스스로의, 서로의 리스트를 보면서 새롭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이들은 어떤가 궁금해졌다. 이제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고, 앞으로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공실이는 밍키의 고등학교 친구다. 34살 인생에서 17년을 친구였으니 인생의 절반을 친구였고 앞으로는 인생의 절반보다 더 친구일 사람이다. 똑같은 ENFJ인데 남다르게 똑똑하고 똑 부러져 밍키와는 정반대인가 싶다가도 오히려 깊은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결이 정말 비슷하다. 공실이에게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아주 구체적인 10가지를 물었을 때 공실이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뿐. 스스로를 잘 알고 행복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1. 제기동의 나정순 할매쭈꾸미 먹을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쭈꾸미야. 사실 제기동은 서울에서도 내가 사는 곳이랑 정반대의 아주 먼 곳이거든? 그런데도 가서 깻잎에 천사채에 쭈꾸미를 올려 먹으면 정말 행복해져.
2. 갑자기 번개로 저녁 먹으러 가서 마시는 첫 번째 술잔
나는 예기치 않았던 뭔가 신나는 일이 생기는 느낌이라 번개가 좋아. 사실 미리 정해진 약속이면 조금 부담스럽거든. 뭔가 자리를 위해서 내가 준비해야 된다는 부담이 있어. 하지만 번개는 그런 부담 없이 내가 원하는 때 생각 없이 신나게 갈 수 있어서 좋아. 신나게 걸어가서 마시는 (주종 상관없는) 첫 잔이 행복해.
3. 열심히 해놓고 보니 결과물이 내 마음에 들 때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회사 일에 신경을 많이 쏟는 편이고 결과물이 잘 나왔을 때 내가 너무 대견해.
4. 사람들이랑 함께 있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다 같이 나를 쳐다보면서 빵 터질 때
5. 비행기 타서 와이파이 끄라고 하고 출발하기 바로 직전
비행하는 14시간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잖아. 작지만 내 공간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는 남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공항에 가는 건 싫지만 비행기 탈 땐 좋고 입국할 땐 긴장되지만 공항에서 나와서 택시를 타면 그때부터 기분이 좋아져.
6. 집에 왔는데 침대 이불이 아주 폭신폭신하게 펴져 있고 공대 인형이 그 안에 있을 때
포근하고 귀엽고 정말 집에 온 것 같아서 편안해. 공대 인형은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함께하던 가족 같은 인형인데 진짜 동생 같은 존재야.
7. 사람들한테 진심의 칭찬을 들을 때
그냥 의례적인 칭찬보다는 내 능력이나 결과물 같은 구체적인 것에 대한 칭찬이 좋아.
8. 목욕탕 열탕에 들어갈 때
물도 좋아하는데 따뜻한 곳에 들어가니 노곤해지니 기분이 좋지.
9. 외국어로 아주 즐겁게 대화했을 때
어학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취미로도 외국어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내가 관심 있는 것을 잘한다는 성취감이 있어. 특히 여행 가서 외국어를 쓸 때는 직접 소통한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그 자체가 재밌어.
10. 나의 미묘한 점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생각이나 고민이 많은 편이야. 그 과정에서 나만의 어두운 면 같은 깊은 생각을 많이 하거든. 예전에는 그것을 혼자서만 생각했는데 요새는 다른 사람들과도 종종 이야기를 한단 말이야. 그러다가 그런 부분에 대해 사람들과 공통점을 찾거나 적어도 공감을 하게 되면 내가 이상하거나 특이한 사람이 아닌, 그저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게 될 때 마음이 안정돼.
종구는 솔구의 든든하고 재밌고 사랑스러운 남편이자 밍키의 초등학교 친구다. 솔구와는 정반대인 MBTI 성향을 가지고 있다.(ESTJ, 엄격한 관리자) 외향적이고 불같은 에너지로 마냥 달리는 듯하다가도 AI처럼 차갑고 칼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 친구인 우리들 눈에는 마냥 스스로 용맹한 늑대인 줄 아는 시바견처럼 보였는데 실제 행복 알고리즘은 엄격한 관리자의 모습이 많다는 것이 새로웠다.
1. 퇴근해서 돌아왔는데 집에 나를 반겨주는 누군가 있을 때
독립을 해서 혼자 보낸 시간이 많았어. 그래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 행복해.
2. 여행을 갈 때
특히 내가 계획해서 부모님이랑 여행 갈 때가 좋아. 특히 열심히 세운 계획대로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모여서 모두가 만족감을 표현했을 때. 사실 부모님이 나한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보답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이럴 때 아들로서 잘 갚고 있다는 생각을 해. 예전에 하도 부모님 속을 썩여서 많이 죄송했거든. 마침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데 부모님도 여행을 좋아하니까 잘됐지.
3. 여행 전에 면세점 들어가서 쇼핑할 때
합법적으로 탈세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족스러워.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세금을 진짜 많이 뗀단 말이야. 그런데 그 세금이 눈먼 돈이어서 굉장히 싫단 말이지. 특히 술과 담배는 세금이 제일 많이 붙는 품목이어서 살 때 뿌듯하기도 해.
4. 리퀴드 샵에 갔는데 아는 와인이 다 보일 때
술이 가장 큰 관심사여서 많이 알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내가 좋아하는 술이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리는 매대에 있을 때 뿌듯해. 내가 맛있는 건 어디서나, 다들 맛있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 술은 특히나 취향을 많이 타는 품목인데 내가 가장 대중화된 입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잖아. 나중에 내가 직접 양조해서 술을 팔 때 사람들에게 잘 먹힐 거라는 확신이 들지. 나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연결이 되고 내 돈이 되니까 좋아.
5. 회사 성장/예산에 관해 예측한 결과가 내 예상과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
내가 내가 맡은 일을 잘 파악해서 잘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이 부서는 내가 책임져서 팀원과 업무들을 정확히 컨트롤하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높은 사람들이 나를 신뢰하게 되거든.
6. 집 청약이 됐을 때
내 예측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잖아. 사실 집이 생겼다는 것보다 청약이 된 게 기분이 더 좋았어. 면밀히 공부하고 예측한 게 나중에 모든 것과 맞아떨어져 현실로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거니까.
7. 친구와 친구들을 소개해주고 시너지가 날 때
서로 몰랐던 여러 사람들과 알게 되면서 새로운 시너지가 많이 생기잖아. 요즘은 특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고, 또 새롭게 만나는 사람이 나와 잘 맞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적어도 친구의 친구라면 나와 어느 정도 잘 맞는 점이 있어서 쉽게 친해지거든. 그렇게 관계를 확장해 나가고 그 사람들과 재밌는 일들을 할 때 행복해.
8.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가 다를 때
회사, 부모, 친구, 대학 동기가 보는 나의 이미지가 다 다를 때가 좋아. 내가 여러 가지 사회적인 롤들을 다 잘 해냈다는 뜻이잖아. 주어진 역할에 따라 의도한 이미지가 잘 이뤄졌구나 싶어서 만족스럽지.
9. 내가 아는 맛집에 좋아하는 사람들 데려갈 때
전국을 돌아다닐 일이 많다 보니 맛집을 많이 아는 편이야. 나만의 맛집 리스트를 가지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서 다들 만족할 때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만약 누가 맛있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분발해야지, 아직도 내가 얘를 파악 못했구나 하는 욕심이 들지.
10.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할 때
나는 미래의 계획이 다 세워져 있어. 그래서 계획을 세운다는 느낌보다는 그 계획을 복기하고 있는 게 좋다는 거야. 양조장을 열거고 집을 사고 하는 등 구체적인 계획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지금이 어느 정도의 과정에 있고 그것을 위해 더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해야지 하는 것에 행복해.
추신. 디저트 여행은 언젠가 다시 연재됩니다.
위치 : 인천 중구 은하수로 1 오션뷰빌딩 4층 (영종도)
한 줄 소개 : 영종도의 푸른 바다와 어울리는 하얀 카페로 브릭바와 스콘이 맛있는 곳
밍키평 : 핫플이라 사람이 많지만 이유가 있다.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에 취해 달달한 브라우니 한 입 먹고 신선이 된 느낌.
솔구평 :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을 때 영종도 ULT에 간다. 브라우니가 너무 꾸덕하지 않고 바삭 폭신한 것이 딱 내 취향.
OV5 1st Project '내 마음을 돌보는 디저트 여행'
사진 : 솔구
글 : 밍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