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마지막 1999년, 나는 고3 수험생이었다. 당시 사회는 21세기를 앞두고 설렘보다는 불안과 긴장이 좀 더 감도는 분위기였다.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 컴퓨터의 연도 인식 오류로 인해 사회적 대혼란이 일어날 거라는 Y2K 문제 등 고3 수험생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다양한 종말론과 괴담이 등장하며 세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공부만 하다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지만 그 당시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매일을 살며 본분을 다하는 것이었다. 부디 종말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1999년은 아쉬움과 불안 속에서 어느 해와 마찬가지로 다사다난한 사건들과 함께 흘러갔고, 다행히 우려했던 사건들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보신각 타종과 함께 21세기가 열렸다. 환호성으로 21세기를 맞이한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세기말에 남아 심란한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21세기가 되었어도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다정하지 않았고 성인이 된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맞닥뜨리고 욕망과 역량의 거리를 실감하며 이리저리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뒤엉킨 실타래처럼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로 삶을 비관하며 살던 시기에 <인생은 아름다워(1999년)>라는 제목의 이탈리아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참혹한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수용소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아버지의 고군분투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 당시영화를 보며 아들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에 눈물을 쏟았지만영화의 감동과는 별개로 왜 인생이 '아름답다’고 했는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세상은 무정하고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의 틈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이 영화가 종종 생각났지만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점점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2년 동안 코로나19로 일상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영화가 자주 생각이 난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지배당한 사회에서 나의 아이들을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홀로코스트와 비할바는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내가 세기말에 느꼈던 불안감과 비슷하다. 예전의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두려움과 슬픔이 음습해 오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살아나가는 방법뿐이다. 어떤 세상이 와도 '귀도'처럼 아이들이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엄마의 역할을 해나가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긴다.전사가 된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데 인생은 아름다운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제목을 다시 생각해본다. 세월이 흐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도 '귀도'가 되어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의 본질 자체가 정말 아름다워서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귀도'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은 '사랑'이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유머감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일상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바탕으로 '귀도'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른다. 아마 지속적으로 바이러스와 싸워야 하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든다(바이러스뿐이라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그런 예감이 들수록 아이들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창조해내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그 방법은 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