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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Nov 13. 2019

집, 어떤 빛을 써야 할까

빛과 삶에 대한 이야기 (4)



첫 직장이었던 조명설계회사에 출근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소장님은 나에게 회사 화장실 램프를 하나 사 오라는 작은 심부름을 시켰다. 기존의 것과 같은 주황빛이 나는 램프를 사 오라는 말과 함께. 근처 철물점에 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사려고 하는 규격의 램프가 놓인 선반에는 '주황색'은 없고 온통 '주광색' 램프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름인데..? 표기가 조금 다른가보다.' 라며 나는 주광색 램프를 사 왔고, 이윽고 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화장실 조명을 본 소장님은 한숨을 쉬셨다. 조명설계회사를 다닌다고 하는 디자이너가 주광색과 주황색도 구분하지 못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는 앞서 우리나라 주거 조명의 문제점으로 방등을 꼽았다. 이는 빛의 형태에 있어 설계상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우리나라 건설 현실이 낳은 극도의 하향평준화 조명이라고 설명했었다. 이 외에 한 가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더 있다. 바로 '색온도'다. 아직 주광색 형광등의 늪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또 다른 문제점이다.



[불면증과 형광등] 편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람의 몸은 자연의 경험을 바탕으로 빛의 색온도에 따라 적응한다. 낮의 신체는 하얗고 푸른 주광색의 빛에, 저녁의 신체는 오렌지빛의 전구색 빛에 더 적합하다. 낮시간 활발히 활동해야 하는 사무실 등엔 주광색의 조명이 많이 쓰인다. 하지만 주거는 어떠한가? 물론 가정마다 주거의 역할은 다르겠지만 많은 경우의 주거 내 조명은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휴식과 충전을 위해 사용된다. 그렇다면 낮은 색온도의 전구색의 조명이 우리의 신체리듬에는 더 좋을 텐데 왜 우리나라 주거의 조명은 대부분 높은 색온도의 형광등일까?



전구는 19세기 후반 발명되어 가장 먼저 사용된 전기 기반의 인공조명이다. 전구는 발열반응을 통해 빛을 내는 광원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색온도의 오렌지빛을 띤다. 태양이나 촛불과 같은 발열반응으로 인한 빛이었기에 전구의 빛은 친근하며 높은 연색성(조명이 물체의 색감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 높을수록 색감 표현력이 좋다)을 가졌다. 하지만 전구는 그런 장점에 낮은 효율도 낮고, 수명도 짧은 편이었다. 그러던 중 형광램프가 개발되었다. 1938년 처음 개발된 형광램프는 백열전구에 비해 밝기는 7~8배, 수명은 무려 10배가 넘는 그 당시 획기적인 기술의 결과물이었다. 형광물질을 통해 빛을 내는 형광램프는 전구가 낼 수 없던 주광색의 광원이기도 했다.



램프의 종류가 색온도를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 후반부터 형광램프가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 가정에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전구에 비해 효율이 좋았던 형광등은 높았던 형광등의 가격이 기술발전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주거환경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색온도가 중요했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적은 전기로도 낮과 환하게 밝혀주는 형광등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조명이 되었다. 전구는 어두침침하다 라는 고정관념과, '높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백열전구를 대체해온 형광등이 아파트 발전 시대에 맞물리면서 현재의 대한민국 주거 빛환경을 만들었다.



이와는 다르게 서구 유럽권에서는 형광등은 주거의 용도보다 '작업등'의 용도로 인식한다. 병원, 학교, 도서관 등 높은 효율과 낮과 같은 밝은 느낌을 주는 조명으로만 형광등을 사용해왔다. 양초와 램프를 사용했던 실내조명이 전구와 할로겐램프로의 대체는 가능했지만, 형광등이 주거의 영역까지는 침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색온도의 인식 차이로 한국 사람은 서양문화권의 주거조명을 보며 '침침하고 답답한 조명'이라 생각하고, 서구인들은 한국 주거의 조명을 '병원 같은 조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은 서양문화권의 주거조명을 보며 '침침하고 답답한 조명'이라 생각하고, 서구인들은 한국 주거의 조명을 '병원 같은 차가운 조명'이라고 생각한다.




각기 다른 문화에 정답은 없으나 자연의 빛, 그리고 색온도에 적응하는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주거에는 높은 색온도의 주광색의 조명보다 낮은 색온도의 오렌지색 계열의 조명이 주거환경에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렌지색 빛이 저녁다운 빛이라면, 주광색의 빛은 밤을 이기려 하는 느낌이랄까. 



또한 형광등, 특히 주광색의 형광등은 주거환경에 사용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은 조명이다. 형광등이 주광색이라는 이름을 띄었다고 해서 낮의 태양빛과 같은 빛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색온도의 범위만이 태양과 유사할 뿐, 실제로 형광램프가 품고 있는 빛의 스펙트럼은 풍성한 태양빛과 달리 분포가 극히 적고  불규칙하며, 색상의 왜곡도 있다. 빛의 '질'로 따졌을 때는 전구보다도 떨어진다. 게다가 점광원인 전구에 비해 비교적 넓은 면적에서 빛을 내는 형광등은 대비가 적은 빛 형태를 만든다. 형광등 아래서 사진을 찍으면 아무리 해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 건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효율과 익숙함에 이 빛을 계속 사용해 왔다.



재미있게도 이렇게 우리나라 주거 조명이 형광등의 주광색으로 변화할 때, 전구색으로 유지되는 곳이 있었다. 바로 화장실이었다. 초기 형광램프는 스타트 램프라는 것을 통해서만 점등이 가능했고, 그로 인해 스위치를 켠 후 점등까지에는 시간이 걸렸다. 이는 방이나 거실은 한번 등을 켜고 오랜 시간 머물기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사용시간이 짧은 화장실, 또는 센서로 점등되는 현관 등의 경우는 그 점등 지연 현상이 사용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거실은 형광등, 화장실은 백열전구라는 공식이 생겼고, 모든 집안에 주광색 형광등을 설치할 때도 화장실만큼은 전구색을 유지했다. 이는 스타트 램프가 필요 없는 형광등이 개발된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유일하게 집에서 효율이 낮지만 따뜻하고 비교적 풍성한 빛을 내는 공간이 화장실이 된 것이다. 게다가 거울까지 있는 장소라니! 집에서 유일하게 셀카를 찍기에 좋은 빛을 가진 공간이 화장실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 현재는 형광등의 발전과 LED의 개발로 인해 이제 우리는 광원의 종류와 상관없이 원하는 색온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광원의 종류가 색온도와 밀접했다면 이제는 광원은 광원대로, 색온도는 색온도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혼란스러워한다.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양해진 조명기구의 형태만큼이나 램프가 가진 빛의 컬러도 다양하다. 이 수많은 선택지 중 우리는 어떤 빛을 골라야 할까?




어떤 색온도의 빛이 우리의 주거환경에 좋을까?




좋은 인테리어를 위한 콘텐츠와 책들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정작 조명과 빛에 대한 팁과 이야기들은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모두가 조명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하지만 빛에 대해 잘 정리된 책 한 권이 쉽지 않다. 그게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출발점이기도 하다. 겨우 찾은 책들은 번역된 해외서적들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주거문화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제안은 그 사회의 기반이 되는 문화, 이미 익숙해진 경험, 고정관념, 더 나은 환경에 대한 갈망 등 여러 가지가 뒤섞여 있기에 한 가지의 명쾌한 솔루션을 만든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이 쌓여 만들어진 나름의 제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주거 조명이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시기는 저녁시간이다. 빛이 잘 드는 주거환경이라면 낮시간은 실내조명보다 주광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내부의 조명들은 대부분 보조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내조명이 주된 역할을 하는 시간은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부터이다. 하루의 사이클이 끝나가고, 사람의 몸이 내일을 준비하려고 하는 그 시점에 많은 집들이 새벽을 알리는 푸른빛의 주광색 형광등을 켠다. 자연이 만든 몸의 사이클과 맞지 않은 빛 환경이다. 예민한 경우 불면증이나 우울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형광등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익숙해져서 혹은 형광등이 ‘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나이가 있는 어른들에게 더욱 잘 들을 수 있는 의견이다. 전구는 침침하고, 형광등은 밝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빛을 감지하는 인지능력은 점차 줄어들고, 젊은 사람보다 나이 든 사람이 약 두배의 조도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빛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서 따로 한번 다룰 예정이다) 하지만 두배의 조도가 필요한 것과 색온도는 엄밀히 말하면 관련이 없다. 그보다는 단지 경험에서 축척되어 온 전구의 낮은 조도, 그리고 낮은 연색성 램프를 사용하면서 생긴 어색한 색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 형광등에 익숙해져 버린 시 환경이라 보는 것이 가깝다.  물론 디자인은 사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사용자가 더 익숙하고 좋다고 여기는 빛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빛의 품질과 사용자의 축적된 경험, 이 두 가지 모두 아우르는 해답은 없을까?


다행히 절충안이 있다. 바로 주백색(또는 아이보리)으로 불리는 4000K 조명이다. 형광등과 전구의 중간색 조명이 존재한다. 이는 "백열전구=오렌지색, 형광등=주광색"처럼 각각 빛을 내는 방식으로 인해 색온도가 결정되던 시기에는 나오기 어려웠던 램프 컬러다. CDM 같은 메탈할라이드 램프가 이 색온도로 빛을 낼 수 있었지만 메탈할라이드는 램프도 고가일뿐더러 안정기가 별도로 필요했고, 기본적인 와트수도 높아 가정에 사용되기에는 부적합했다. 하지만 이 컬러는 그야말로 너무 붉지도, 또 하얗지도 않은 적절한 중간색이었으며 조명설계 회사에서 일하던 나는 이 램프를 가장 좋아했다.



3000K(전구색)과 6000K(주광색) 사이의 빛인 4000K 조명은 한국 주거공간 빛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출처:littleanvil.com)



하지만 전구색 형광등이 개발되고, LED가 개발되면서 색온도를 빛을 내는 방식과 별개로 맞출 수 있게 되면서 가정에서도 4000K 램프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내 관점에서는 굉장한 기회이자 축복이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000K의 색온도를 내는 형광램프는 필립스, 오스람의 아주 일부 기업에서만 나오는 램프였고, 그마저도 구하기 어려웠다. LED의 시대가 된 지금 4000K는 물론 3000~6500K를 오가며 자유자재로 색온도 변화까지 되는 램프가 다양하게 개발되고 또 판매되고 있다.



이 4000K의 조명을 잘 활용하면 우리 공간의 빛은 보다 나아질 수 있다. 오렌지색 조명을 사용할 때의 침침함은 없애면서, 저녁시간에 켜는 형광등의 어색함도 상쇄시킨다. 가장 쉬운 방법은 현재 주광석 형광등이 설치되어 있는 등기구의 램프를 4000K 램프로 바꾸는 것이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램프의 규격을 파악한 뒤 인터넷에서 같은 규격의 4000K 램프를 구매해 교체만 해주면 된다. 대단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다. 형광램프 타입의 조명은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일반 형광등에 비해 거부감은 크지 않은데 비해, 이 빛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다시 주거공간에서 주광색 조명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아 질 것이라 감히 확신한다. 주광색이 '병원 조명' 같다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4000K 램프는 아직 오프라인 매장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을 통해 "백색, 주백색 또는 아이보리"라고 표기되어 있는 4000K의 램프를 주문하자. 



익숙했던 것에서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 할 때는 늘 기존의 관성에 도전해야 하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4000K의 조명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좋은 빛을 알리고자 하는 나에게는 축복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아직도 가장 적게 팔리고 가장 구하기 어려운 컬러지만, 아직 접해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꼭 한번 사서 집에 사용해 보시기를 권한다.



기존의 조명을 4000K로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다면, 또는 나는 원래 주광색 형광등이 싫었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한 공간에서 몇 가지의 색온도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공간의 전체를 밝히는 조명은 보다 낮은 색온도로, 집중하고 작업이 필요한 조명은 국부적으로 보다 높은 색온도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실과 부엌의 천장 조명은 3000K의 전구색 계열의 조명으로 따뜻하게 만들고, 식탁이나 거실의 소파 테이블, 싱크대와 같은 공간은 4000K 정도의 조명을 주변보다 조금 더 밝게 사용하는 것이다. 거실 천장의 형광등은 낮시간 밝은 태양광과 큰 대비를 보완하기 위해 사용하고, 저녁시간에는 낮은 색온도의 할로겐 타입 다운라이트와 소파 옆 플로어 스탠드를 사용해보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공부방이라면 천장의 조명은 4000K의 조명으로, 책상 위 스탠드는 5~6000K의 주광색 조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휴식시간의 낮은 색온도와 집중하려 할 때의 높은 색온도를 함께 가져갈 수 있다.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빛을 사용하는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휴식, 독서, 집중, 취침, 요리, 식사, 대화 등 용도와 시간에 맞춘 보다 좋은 빛을 집이라는 공간에 사용할 때가 되었다. 비싼 조명, 멋진 디자인의 조명을 사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집의 규모보다 그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조명기 구보다 그 속에서 나오는 빛을 한번 더 고민할 때 우리의 집은 보다 좋은 공간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집의 규모보다 그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조명기구보다 그 속에서 나오는 빛을 한번 더 고민할 때
우리의 집은 보다 좋은 공간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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