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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Feb 11. 2020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

다양한 디자이너가 공존하는 사회를 위하여

디자이너들 사이에는 서로를 평가하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다. “포트폴리오로 이야기하라."가 그것이다. 이제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많은 곳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어 그 정의에 영역에 대해서 매번 논의가 필요한 정도의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라는 단어는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비해 아직까지 그 의미가 생각보다 꽤나 협소한 부분에 머물러 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기본적인 역할은 ‘형태’를 다루는 사람이다. 어떠한 제품이나 공간, 또는 서비스를 사용성과 미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최종적인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각, 산업, 공예, 패션, 영상 등 다양한 범주에서 거의 유사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영역을 넘어 ‘좋은 디자이너’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일단 형태를 잘 다루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로 디자이너들 사이에 더욱 강하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달고서 기획을 하고, 글을 쓰고, 디렉팅 하고, 제품을 셀렉하는 등 형태를 벗어나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디자이너들을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직접 디자인한 게 뭔데?”






나의 전공은 산업디자인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2000년대 초반은 '산업디자인=전자제품 디자인'과 같은 공식이 진리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그 당시의 나 역시 남들이 하는 것처럼 당연하게 전자제품 디자인에 몰두하며 대기업 준비로 처음의 2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떤 기회들을 통해 건축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되어 남은 2년은 건축과 수업을 전공수업보다 더 많이 들으며 학교를 마쳤다.



그렇게 들어간 첫 직장이 조명설계사무소였다. 아주 가끔 조명기구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 일의 대부분은 공간에 조명을 알맞게 배치하여 좋은 빛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적용하는 공간은 지하철, 빌딩, 교량, 공원, 아파트 등 다양했다. 하지만 공간 또는 조형물의 형태를 직접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를 통해 디자인된 대상을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빛으로 채울 수 있느냐가 ‘조명 디자이너’의 역할이었다. 그렇게 나는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조명 디자인은 디자이너로써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 분야였다. 디자인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고, 배광, 조도, 휘도 등의 기본 조명 이론을 습득해야 했으며, 램프와 등기구 등 업데이트되는 최신 기술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가져야 했다. 그뿐 아니라 에너지와 효율, 빛과 환경에 관한 문제, 사람의 인지와 경험에 이르기까지, 빛은 그 형태가 없지만 다양한 요소를 통해 공간과 형태 그리고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각까지 설계하는 매우 중요한 디자인 요소였다.



두 번째 직장은 콘크리트라는 소재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 스튜디오였다. 건축과 수업을 듣던 시절 알게 된 건축재료공학 전공의 지인이 UHPC라고 불리는 초고성능 콘크리트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 회사의 창업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다시 ‘형태’를 다루기 시작했다. 콘크리트라는 재료로 가구, 세면대, 패널, 공공시설물 등 제품 디자인 총괄을 맡았다. 사람이 많아지고 디자인팀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재료가 가진 물성, 그리고 제작과정의 특성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제품을 다양한 형태로 디자인을 진행했다. '내가 디자인한 것이 이거야'라고 보여줄 수 있는 형태를 가진 제품이 하나둘씩 세상에 나오자 이전보다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좀 더 편해졌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기획과 브랜딩, 디렉팅 등 보다 넓은 범위의 일이었지만, 디자이너라는 명칭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 앞에 설 때면 내가 '그려낸' 제품을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정답같이 보였다.



두 번째 직장에서 퇴사한 후, 지금의 나는 글을 쓴다. 빛과 조명에 대해 오랜 시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오면서 전문가가 붙어 조명설계를 할 수 있는 대단한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 있는 주거와 생활공간의 빛환경을 더 좋게 만드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명만 별개로 떼어 설계를 하기엔 주거 인테리어는 그 규모가 너무 작고, 내가 손댈 수 있는 몇 건의 일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보다 빛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개선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글을 쓰게 되었다. 글로써 공간의 빛을 설계하고 제안하고 바꿔나가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난 다시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이너는 반드시 형태를 다루어야만 할까?



글을 쓰기 시작하고, 글을 통해 새로운 역할과 만남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나에게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그 호칭에 설레기도 하고 또한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글'은 수단일 뿐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디자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치며 나는 첫 직장에서 끊임없이 했던 이 물음 앞에 다시 섰다. 디자이너는 반드시 형태를 다루어야 할까? 형태라는 틀을 넘어 다양한 영역에서 디자이너라는 역할로 활동할 수는 없을까? 그들은 디자이너라고 불리기보다 기획자, 작가, MD, 디렉터라고 불려야 할까? 그들을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라고 볼 수는 없을까.



언제부터인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 역시 디자이너를 형태에 묶어 두었기에 나온 단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분명 이 역할은 사람 혹은 사회를 위해 필요한 무언가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가치를 만들어 내는 역할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형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기에 디자이너라는 말을 붙이기는 어려웠으리라. 문제는 이러한 역할의 한계를 사회가 아니라 디자이너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래도 형태를 가진 결과물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직접 디자인한 결과물이 없다면 디자이너는 아닌 것이다. 형태를 다루지 않으면서 디자인을 논하는 것은 ‘입으로만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영역의 순수성을 지키는 행위 같지만 한편으로는 디자이너라는 역할을 그림 그리고 형태 만드는 사람이라는 협소한 틀 안에 가둬놓는 행위이기도 하다.



디자인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많이 다른 분야가 있다. 서점에서 이 코너만 가면 흐뭇함과 부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바로 건축이다. 건축은 다양한 형태의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사유와 시각 그리고 책과 글이 풍성하게 존재하는 분야다. 제품 디자이너처럼 형태에 강한 건축가가 있는가 하면,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가 뛰어난 건축가가 있으며, 사회적인 측면으로 건축의 역할을 고민하는 건축가가 있다. 역할면에서도 다양한데, 뛰어난 건축을 소개하는 사람, 누군가의 건축물을 사진으로 남기는 역할을 하는 사람, 건축 이론과 역사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건축가, 대중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건축가와 건축가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도 각기 존재한다. 그 역할의 결과물 역시 책과 글, 사진과 영상, 강연과 컨설팅, 기획과 디렉팅 등 영역을 뛰어넘는다. 형태를 다루지 않는 건축가는 형태를 다루는 건축가만큼이나 중요하며, 결국 더 뛰어난 건축을 만드는데 서로의 역할을 다한다.




디자인 분야도 다양한 책과 글이 존재하기를.






디자이너는 그 영역을 스스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영역이 확장된 만큼, ‘디자이너’라는 단어의 영역도 확장되기를 바라본다. 그림과 형태가 디자인의 본질이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며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본질임을 이해하고 디자이너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포트폴리오만을 기준으로 디자이너의 자질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디자이너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짓는 일임을 디자이너 스스로가 생각해야 한다.



형태를 다루지 않는 디자이너가 늘어나길 바란다. 또한 사회도 디자이너의 역할이 훨씬 더 넓고 다양함을 인식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작가, 기획자, 디렉터가 아니라 글을 쓰는 디자이너, 기획을 하는 디자이너, 디렉팅을 하는 디자이너처럼 있는 그대로 인정되었으면 좋겠다. 탄탄한 개념과 기획을 기반으로 형태를 다룰 때, 우리는 그것이 보다 나은 디자인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디자인은 협업을 기반으로 한다. 다양한 역할에 재능을 가진 디자인팀이 모여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멋진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으며 디자이너의 역할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단지 시각과 형태에 대한 감각이 남들에 비해 다소 부족하다는 이유로, 뛰어난 디자인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디자이너’이라는 이름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형태를 다루지 않더라도 충분히 멋진 디자이너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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