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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Apr 23. 2020

벚꽃보다 신록

이 시기에만 즐길 수 있는 투명함과 빛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봄이 되면 어김없이 벚꽃이 만개한다.  짧은 기간 화려하게 피었다가 어느 순간 봄바람에 흩날리며 사라져 버리기에 사람들은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올해는 특수한 상황으로 그러지 못했지만) 너도나도 벚꽃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나무 한가득 옅은 핑크를 품은 하얀빛 벚꽃나무를 보며 우리는 봄이 왔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하얀 목련도, 노란 개나리도 봄을 알리지만 무엇보다 봄이 왔음을 드라마틱하게 알리는 건 누가 뭐래도 벚꽃이다.



화려한 벚꽃의 봄도 좋지만, 사실 나는 이보다 더 좋아하는 봄의 모습이 있다. 바로 가장 아름다운 초록빛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봄의 신록(新綠)이다. 벚꽃은 화려한 한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면, 초록은 연두색에서 짙은 청록, 갈색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긴 여정의 색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봄의 초록은 다양한 초록 중에서도 가장 설레고 아름다운 색이라 생각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한국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영하 님의 ‘신록예찬’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다. 저자는 자신이 모든 초록을 사랑하지만 특히 잎이 돋아 나오는 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록의 초록을 사랑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좋고 싫음)이 없다. 가장 연한 것에서 가장 짙은 것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고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 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한다면, 삼복염천(三伏炎天-여름의 몹시 더운 날씨)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가려서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리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연한 녹색)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 신록예찬 중에서






신록예찬을 읽은 후, 나는 매해 봄이 되면 이 싱그러운 초록을 즐긴다. 누군가는 잠깐 피고 지는 벚꽃잎을 찾아 봄 나들이를 나서지만, 나에게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순간이 이 찬란한 초록빛을 감상하는 시간이다. 그 초록빛을 보고 있자면 없던 희망과 순수함도 생기는 것 같다. 크게 한 사이클로 젊음과 늙음을 겪는 사람과 달리, 매해 새롭게 젊음을 만끽하는 나무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글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 초록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매우 짧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다.



그렇다면 왜 이 시기의 초록은 다른 시기의 초록에 비해 아름다울까. 우선 춥고 긴 겨울을 견디고 새롭게 피어나는 잎사귀의 색을 매우 밝다. 노란빛을 잔뜩 머금은 연두색 잎은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색이다. 또한 긴 겨울 낮은 채도의 자연에 익숙해졌다가 싱그럽게 피어나는 세상의 아름다운 색에 감동을 받는 우리의 마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이고 싶다. 어린잎의 ‘투명함’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이고 싶다. 바로 새로운 잎의 ‘투명함’이다.




내가 생각하는 봄의 초록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햇살 좋은 날, 나무 밑에서 바라보는 봄의 잎사귀들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록빛을 내며 빛난다. 봄의 잎사귀는 가장 연한 색을 가지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얇고 투명도가 높은 시기이기도 하다.




신록의 잎은 그 연한 색뿐 아니라 투명함으로 인해 더 아름다운 빛을 뿜어낸다.



잎사귀가 반투명하다는 것은 햇빛을 반사하는 것뿐 아니라 일부는 머금고, 일부는 투과시킨다는 이야기이다. 햇빛 아래 봄의 잎사귀들은 빛을 품는다. 그리고 품은 빛을 통해 자체적으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현상은 내가 나무 밑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투과의 과정을 통해 인식되는 색은, 반사를 통해 보게되는 색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화사람이 있다. 꽃에서 느껴지는 색이 다른 색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이 반투명한 대상의 특성 때문이다.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역시 이와 같다. 달이 반사하여 빛을 낸다면, 구름은 빛을 투과시킴을 통해 빛난 다. 맑은 하늘의 구름은 하얀색 조명이다. 태양빛을 머금고 또 투과시키면서 하얀빛을 낸다. 하늘이 밝은 파란색의 조명이라면, 맑은 날의 구름은 하얀색 조명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구름이 두꺼워지고 투과 하는 정도가 줄어들면, 구름이 뿜어내는 빛은 줄어들게 되고 우리 눈에 구름은 회색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내 빗방울을 쏟아낸다.)



봄의 얇은 잎사귀나 하늘의 구름처럼 반투명한 소재는 강한 직선의 빛을 난반사시켜 부드럽고 포근한 빛으로 바꾼다. 혹은 색을 가지고 있어 유색의 빛을 공간에 뿌린다. 집안에서는 대표적으로 커튼이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커튼은 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직선의 선명한 빛을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또한 커튼에 색이 들어가면 그 자체로 하나의 컬러 조명이 되기도 한다.



커튼과 종이처럼 반투명한 소재는 빛을 부드럽게 만든다.



조명기구에서는 천이나 종이로 된 조명기구가 공간에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램프의 작은 면적에서 나오는 빛을 머금고 또 투과시켜 보다 넓은 면적에서 부드러운 빛을 공간에 퍼트린다. 각 면을 이루고 있는 소재의 색이 다를 경우, 램프는 하나지만  방향마다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내보낼 수 있다. 사람의 얼 굴로 향하는 옆면의 빛은 따뜻한 노란색으로, 천장으로 향하는 빛은 하얀색으로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색이 있는 반투명한 소재에 빛이 투과되는 것은 사물의 표면에 반사되어 색이 보이는 것보다 공간과 사 물에서 더 큰 상호작용을 한다. 이는 눈으로 보기에 더 높은 채도를 만들기도 하며, 그림자 역시 사물의 빛으로 빛난다. 이전에는 조명의 소재로 이러한 반투명 소재들이 사용되었다면, 최근에는 이러한 투명, 혹은 반투명의 소재들을 사용해 가구가 제작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글라스 이탈리아(Glas Italia)는 유리라는 소재의 투명성을 사용한 가구를 만든다. 투명한 유리에 색을 입히고, 그 재료가 가구가 되어 공간에 존재할 때, 가구는 하나의 조명이 된다. 램프를 품고 있지 않다고 공간에 존재하는 빛을 머금고 또 발산하며 공간의 벽, 바닥과 주변 사물과 상호작용 한다. 이러한 빛의 특성을 활용해 최근에는 색을 가진 아크릴을 사용하여 다양한 디자인 제품들이 만들어진다.



반투명한 소재가 주는 빛의 아름다움 (출처:Glas Italia)



어떤 재료를 선택하는지, 어떤 색을 선택하는지, 빛을 어느 정도로 투과시킬 것인지, 표면의 광택은 어떻게 할 것인 지에 따라 빛은 다른 형태와 색으로 투과되고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재료의 외형을 다루고 재료의 색을 다루는 일은 단지 물리적인 제품의 외형을 다루는 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빛을 다루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때보다 답답한 봄을 보내고 있는 지금, 멀리 나갈 수 없지만 집 근처 신록을 찾아 이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운 봄의 초록빛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벚꽃이 주는 화려함과는 다른, 봄과 함께 새롭게 솟아나는 에너지를 어린 잎을 통과한 아름다운 빛을 통해 얻게 될 지도 모른다.



벚꽃보다는 신록, 나는 올해도 싱그러운 초록빛에 한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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