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민 라이트랩 Sep 27. 2019

우리는 사과를 잡을 수는 있지만,
사과를 볼 수는 없다

빛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 (1)










여기에 사과가 있다.


우리는 '사물을 본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한다. 하지만 아주 엄밀한 의미로 접근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없다. 그저 사물을 맞고 튕겨 나오는 빛을 눈으로 감지할 뿐이다. 이것이 뚱딴지같은 소리 혹은 말장난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빛의 성질과 사람의 감각기관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구분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은 '보이는' 것이지 '보는'것이 아니다. 



능동의 의미를 가진 '보다'라는 동사를 시각에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물 방향으로 자유롭게 시선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에 가깝다. 사과가 저기 있고, 난 사과 쪽으로 시선을 돌려 사과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을 아직 잘 모르던 옛날 사람들은 보는 행위를 눈에서 마치 레이저처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나와 사물의 표면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우리가 마치 손을 내밀어 사과를 잡는 것처럼. "나는 사과를 본다."라는 표현에는 다음의 두 개체만이 존재한다.



사과(사물)  -  사람(시각)



아무것도 없는 방 한가운데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 당신을 사과를 보고 있다. 시선을 그곳에 두고 있기에 나는 사과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를 사과와 나와 둘만의 관계라 인식하고서. 하지만 이내 불이 꺼지고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당신의 시선은 여전히 사과를 향해 있지만, 사과는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는다. 사과와 나 사이에 '빛'이 존재했었다는 걸.



사과(사물)  -  빛(조명)  -  사람(시각)



우리는 빛 없이는 사물을 볼 수 없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사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지만 나는 사과를 볼 수 없다. 빛이 있었기에 그동안 사과가 '보인' 것이지 '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시각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인 감각기관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각기관은 시각과 거의 비슷한 수동적 감각기관이지만 감각기관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수동적 표현인 '들린다'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한다. 또한 물체 그대로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지한다는 것을 더 잘 인지하고 있다. '폭포를 들었다' 또는 '바이올린을 들었다'라고 하지 않고, '폭포 소리를 들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다. 물체와 나 사이에 '소리'라는 매개체가 있음을 우리는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다. 빛도 마찬가지다. 아주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사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과를 맞고 튕겨져 나오는 빛을 볼뿐이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는다. 사과와 나 사이에는 '빛'이 존재했었다는 걸.




1억 5천만 킬로미터 거리의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대기권을 거쳐 주방 옆 창문을 통과해 식탁 위의 사과를 맞고 반사되어 카메라 렌즈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물체를 비추고 있는 빛이 어떠하냐에 따라 우리가 인지하는 사과도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빛이 사과 위에 있을 때, 앞에 있을 때, 옆에 있을 때, 뒤에 있을 때 눈으로 보이는 사과의 모습 역시 각기 다를 것이다. 심지어 파란색 조명 아래 사과는 파랗게, 노란색 조명 아래 사과는 노랗게만 보일 것이다. 사과라는 물체는 전혀 변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좋은 공간, 고급스러운 마감, 멋진 가구가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빛을 통해 내가 그것들을 마주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눈을 통해 물체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에 반사된 빛만을 인지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남들이 좋다는 도시에 여행을 갔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을까, 왜 똑같은 구조의 집인데 이렇게 느낌이 다를까, 왜 매장에서 본 멋진 가구와 제품은 우리 집만 오면 평범해 보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들의 답은 대부분 빛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 갖춘 것 같았지만 어딘가의 아쉬움에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던 문제들은 대부분 마지막으로 조명이 해결될 때 완성된다. 그것이 공간이든, 사물이든, 한 장의 셀카든 말이다. 빛을 통해 달라진 이미지를 보며 우리는 익히 들어왔던 한마디를 던진다. "그봐, 다 조명빨이야."라고. 나는 그 말을 조금 더 고급스럽게 하고 싶다.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빛이다.



우리가 빛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사물과 공간이기 이전에 '빛'이기 때문이다. 태양과 푸른 하늘의 자연광에서부터, 커튼을 지나 집안에 퍼지는 빛, 요리를 하는 주방의 조명과 침실의 조명, 책상 위 조그마한 스탠드 조명의 빛, 신호등과 간판의 불빛, 미술관과 공연장의 빛까지. 그리고 그 빛들이 사물과 공간에 퍼지고 우리 눈에 담겨 시각으로 인지되어 느끼고 기억되는 모든 것이 빛을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떤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에게 더 좋은 빛이 어떤 빛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하나하나 바꿔 나갈 때 우리의 모든 보는 행위는 보다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작게는 우리의 삶에서부터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지금부터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빛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보고자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