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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수민 라이트랩 Aug 17. 2020

커피, 그리고 혁신에 대하여

헤리티지(Heritage)라는 성벽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디자이너를 위해

이탈리아에 처음 여행을 갔던 2000년대 중반, 당시 로마 시내 가이드를 해 주던 분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매우 인상 깊었다. (당시 기준으로) 세계에는 있지만 이탈리아에는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배스킨라빈스, 피자헛 그리고 스타벅스라고. 아이스크림(젤라또), 피자, 커피 모두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미국 브랜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들만의 자존심 넘치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들의 탄탄한 전통은 먹고 마시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각종 명품 패션에서부터 세계 최고라 불리는 다양한 가구들과 화려한 디자인까지, 이탈리아는 분명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앞선 문화를 다수 가지고 있다.



좋은 문화는 계승되고, 계승이 이어지면 전통이 된다. 전통은 문화가 축적되고 다듬어지며 보다 완성형이라 불릴만한 형태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최근에는 헤리티지(Heritage)라는 단어가 그 전통과 유산이라는 단어를 대체하는 듯하다. 그렇게 완성형으로 다듬어진 전통, 곧 헤리티지는 다른 누군가가 쉽게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이 된다. 그 성벽 앞에서, 우리의 디자이너들은 때로는 감탄하기도, 때로는 넘을 수 없는 벽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게 완성형으로 다듬어진 전통, 곧 헤리티지는
다른 누군가가 쉽게 넘볼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이 된다.



하지만 영원한 성벽은 없다. 전통은 혁신을 방해한다. 완성형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 누려오던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모여 오랫동안 이어진 관성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전통이 깊은 문화일수록 혁신은 더디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뛰어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탈리아는 아이스크림, 피자, 커피 중 그 어느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브랜드를 갖지 못했다. 스타벅스가 온 세계를 상대로 한 최대의 기업이 된 이 시기에도, 여전히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 얼음을 넣어 차게 마시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콘텐츠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우리에겐 '커피는 외국문화'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것이 이탈리아로부터  커피 문화건, 미국에서  커피 문화건 어떠한 외국의 문화를 즐긴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돌려보면 커피는 이탈리아에서도 미국에서도 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콜롬비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타국의 생산물인 커피를 기반으로, 그들이  만들어   '커피를 마시는 문화 커피는 아니다. 본래 유럽보다 먼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이슬람 문화권에는 터키식 커피처럼 그곳만의 커피 문화가 있다. 콜롬비아는 콜롬비아대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동남아는 동남아대로 나름의 커피 문화를 만들어왔다.

 


우리에겐 어떤 커피 문화가 있을까? 무언가 생기지 못하고 미국식이나 이탈리아 커피 문화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는 것에 그치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혁신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 혁신은 기존의 전통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전통은 혁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혁신은 기존의 전통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커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의복과 가구, 건축과 자동차,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20세기부터 서양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아온 우리는 어떤 카테고리에서든 디자인의 접근을 시작하면 오래된 서구문화의 탄탄한 전통의 성벽에 부딪히게 된다. 아무리 날뛰어봐야 결국 그들의 아류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혁신은 전통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만들어낸다. 유서와 전통을 자랑하던 서구 유럽이 서서히 가라앉고, 짧은 역사에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이름의 '전통'은 자유로운 또 다른 누군가가 금을 내고 결국 무너뜨릴 것이다.


만약 문화를 즐기는 입장이라면 기존의 전통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약 자신이 머물고 있는 분야가 그동안 쌓여온 전통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분야라면 그 견고한 성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수많은 선배들의 노력에 감사하고, 또한 그 성이 주는 안락함을 충분히 누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러면서도 이미 누군가 만들어 놓은 전통이라는 성벽 앞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 수 있어야 한다. 주어진 역할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통에서 자유로운 우리의 역할은 기존의 질서과 규칙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과감히 버리고, 융합하고, 재배치해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혁신은 전통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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