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은 일반적으로 자기 몸 크기의 100배가량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약 60cm 이상을 뛸 수 있다고 하죠.
그런데, 그런 벼룩을 30cm의 유리병 안에 넣은 뒤, 투명한 유리뚜껑으로 덮어놓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뛰어오르던 벼룩이 유리 뚜껑의 천장에 부딪히며 고통을 느끼게 되죠.
계속해서 부딪히며 고통을 느낀 벼룩은 어느 순간부터 천장에 닿지 않을 만큼만 뛰어오르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유리뚜껑을 치워도 여전히 그 높이만큼만 뛴다는 사실입니다.
유리병 높이보다 다소 낮은 28cm로 뛰게 된다고 합니다.
유리병 속의 벼룩은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나오는 예시로,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가두지 말고, 셀프 한계 설정을 경계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벼룩처럼 원래 자기 몸 크기의 100배, 아니 그 이상을 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지 말라고, 이를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내 자신을 들여다보겠습니다.
과연 내가 스스로 한계를 설정하였까요?
내가 원하던 꿈과 희망을 점점 좁게 만든 환경과 사람은 무엇이고 누구였을까요?
답은 의외입니다.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과 환경에서 나옵니다.
학교와 직장, 나의 집, 그리고 나의 가족- 부모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이를 유리병 속에 가두려고 하지 않나요?
아이에게 씌우는 한계는 여러가지이지만
교육에서 대표적인 유리병 중 하나는 성적과 안정적 직업입니다.
등급, 서열식 결과와 답을 맞추는 수렴식 사고는 자녀의 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아주 딱딱하게 굳은 유리병처럼, 아이의 한계를 설정하며 어른들이 후대를 통제하기 쉬운 방법이 됩니다.
이를 빨리 깨닫고 아이들의 유리병을 깨뜨려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아이의 유리 뚜껑을 꺼내주고,
주변의 유리병을 깨부수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노력하지 않아도 아이는 학원과 학교, 그 외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계를 배우고 옵니다.
그러니 이를 없애주는 공간은 가정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 통념과 인습을 후대에 그대로 물려주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가능성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탐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묻는다면, 개개인의 특성마다 가능성이 다르지만 확실한 답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바로 부모의 독서와 책육아입니다.
자신의 한계(유리병)를 깨고 꿈을 마음껏 펼쳐 나간 사람들이 쓴 책을 아이와 함께 보세요.
자녀가 아직 어리다면 독서 습관을 잡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음 시리즈 글에는 부모 독서와 책육아에 관해 쓰겠습니다.
현설맘과 같이 없이 키우는 육아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