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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만식 Apr 20. 2023

상실을 끌어 앉고

난니 모리티_ 영화[아들의 방, 2001]


   유한한 우리의 삶은 끝이 있다. 끝은 언제나 한계를 짓는다. 시간의 변화를 덧입고 그 시간에 묻힌다. 우리는 그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사랑한다. 하지만 역으로 두려워한다. 어둠 없는 삶을 갈망한다. 희망한다. 그런 삶을 바라본다. 두려운 삶과의 이별을 고대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두려움의 대상을 포획해서 숫자에 가두려 한다. 질서와 의미 속에 숨기려 한다. 그리고는 안심한다. 하지만 안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포획되지 않은 세계인 ‘날 것“, ”야생의 세계(혼돈, 불안, 두려움, 공포, 질병, 죽음, 상실)“를 결코 피할 수 없고, 채울 수 없고, 제거할 수도 없다. 이는 공백 때문이다. 공백은 우리 존재 안으로 언제나 예고 없이 파고 든다.






  파고 드는 순간, 우리의 평범했던 일상은 그대로 멈춰 버린다. 한순간 사라진다. 선명했던 기억은 상실의 고통으로 남는다.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와 목적을 수없이 묻고 묻지만, 물음표만 남긴다. 고통은 우리를 지배한다. 생각을 지배하고 감정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한다. 답 없는 답만 남긴다. 진정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돌아올 수 조차도 없다. 결핍 덩어리,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또 내릴 수조차 없는 결핍, 질서가 부여되지 않는 또 정리되지 않는, 포획되지 않는 ”날 것(상실)“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게 한다. 우리의 한계, 유한한 삶, 그 너머를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겸손케 한다.     






   난니 모리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2001)]은 이런 유한한 존재인 우리의 삶과 날 것의 고통, 상실을 이야기한다. 결코, 포획되지 않는 또 포획할 수 없는 공백을 보여준다. 멜랑콜리, 강박증, 히스테리, 성도착증 환자들을 상담하던 정신상담가 주인공 조반니, 그의 탁월한 상담 실력도 갑작스럽게 파고든 “날 것”으로 인해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 “날 것”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인간의 생과 사를 인간 편에서 어찌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삶을 조절하고 조율하고 다스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래 설까? 인류는 이 “날 것”으로부터 안정된 삶을 유지하고자 세계를 질서화하고 의미화하려 했다. 오랜 세월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유한성, 한계, 그 끝(상실, 죽음, 고통, 아픔, 이별)은 포획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아들 안드레의 죽음, 그 상실로 인해 울부짖는 가족들, 그들의 처절한 고통이 거대한 공명으로 들려왔다. 남겨졌다는 이유로 괴로움은 그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울부짖는 엄마 파울라의 모습에서 마음이 저려 왔다. 아빠 조반니의 모습에서도 덧없음이 느껴졌다. 모든 것의 “헛됨”이 보였다. 동력을 잃어버린 좌초된 배처럼 “의미 없음”이 느껴졌다. 딸 이레네의 “분노”도 “절망”도 보였다. 이겨내려는, 도움이 되려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이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지금도 분초마다 자의에 의해, 타의에 의해 삶을 끝맺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세월호 사건, 9주기인 오늘, 꽃다운 아이들, 304명을 차가운 바다에서 잃은 날이다. 그 고통, 아픔, 상실의 기억을 우리는 안고 있다. 자녀를 잃은 부모와 가족들, 표현 못 할 그 고통 앞에서 뭐라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아들 안드레의 여자 친구 아리아나의 출연과 그녀가 보여준 행동은 남겨진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준다. 안드레의 가족들 앞에서 그녀가 보인 발칙한(?) 행동(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하는/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은 희망 그 자체였다. 살아야 한다는 외침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외침으로 말이다. 비록 상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또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피투 된 현실에서 또다시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찾아 기획 투사하라는 남겨진 자들에게 들려주는 소리처럼 들렸고 보였고 그렇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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