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나가세요. 머물면 번져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사이부터
사군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빨간 매화꽃을 그릴 기대가 컸는데 검은 선의
나뭇가지 그리는 것부터 시간이 걸렸다.
물 농도를 여러 번 맞춰보고 손끝을 세심하게 해봐도
자꾸만 번지는 탓에 선 하나 긋기도 어려웠다.
여러 번의 선을 망치고 있는 내게 강사님께서
한마디 툭 던지셨다.
선이 번지는 이유는 물 농도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내 손이 망설였기 때문이란다.
어려웠다 역시. 그냥 지나가는 것.
지나쳐야 하는 순간을 지나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탓에 남긴 번짐들이 떠올랐다.
어떤 번짐은 아름다운 문양으로 남기도
하겠지만 이렇게 선을 그어야 하는
명확한 일 안에서 생긴 번짐은 삶이란
화선지 위에 남긴 얼룩일 뿐이었다.
지나쳐야 하는 이에게 선을 그으려 머뭇거리는
동안 번져버렸던 내 마음처럼.
혹은 오래전 과거의 시간에서 지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머물러 있는 미련처럼.
망친 선으로 가득한 화선지를 구겨버리고
새하얀 화선지를 다시 피고 붓을 잡았다.
까만 선을 긋는다.
지나간다.
선이 그려지고 나뭇가지가 완성되고 꽃도 채워진다.
망설이지 않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를, 어떤 시간을.
#02. 두 번째 번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