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엎질러졌다면,
책을 보다가 캘리그라피로 예쁘게 써 보고 싶은 문장을 발견했어.
일단 종이 귀퉁이에 대강 적어 두고 펜을 바꾸기 위해 손을 올리는 찰나,
잉크병을 통째로 엎질러 버렸지 뭐야. 책상은 물론 카펫과 몸에 묻은 잉크 자국을 닦느라 난리도 아니었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잉크 얼룩에 망연자실하며 ‘내가 그렇지 뭐,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자책하다가 고개를 들어, 좀 전에 문장을 써두었던 종이를 다시 보았어.
쏟아진 잉크 번짐이 문장에서 말하는 녹처럼 배어 있더라.
마치 원래 이것을 위해 잉크가 엎질러진 것처럼, 우연치곤 꽤 근사한 모양새로.
아마 캘리그라피로 더 예쁘게 쓰고 그림을 정성껏 그려 넣었어도 이렇게 어울리게 하진 못했을 것 같아.
얼룩을 닦아내는 데만 집중하느라 얼룩이 준 다른 의미를 보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소란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래,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지도 몰라.
우리의 소란은 겨우 잉크가 아니라 삶이 엎질러질 뻔한 큰일들인데다
잉크 얼룩과 삶의 오점을 비교할 순 없을 테니까.
그래도 말이야. 삶은 때때로 짓궂었지만, 지나고 보면 결국 내 편인 적도 많았잖아.
분명히 우리에게 남겨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 소란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어떤 얼룩으로 남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 할 일인 것 같아.
그러니 이제 그만 고개를 들고 삶을 둘러보자.
#.05 다섯 번째 번짐
쓰다듬고 싶은 모든 순간 _ 민미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