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면서 살아간다. 시선은 권력이고 권력은 곧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이것을 하면 안되고, 이것은 해야 한다'는 초자아가 만들어진다. 초자아들의 세계에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두 가지, 세 가지의 생각을 한번에 풍성처럼 펼쳐놓고서 살아왔던 것 같다. 정신분열은 아니지만 연막작전이라고 할까? 그래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다른 공간에서는 새로운 상상의 세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꺼내더닌 사건을 만들고 주인공을 만들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영화가 되어서 돌아갔다. 두뇌의 좌와 우의 하층부에서는 계속해서 말을 하고 상층부에서는 영화관이 동시에 개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쪽에서는 울고, 한 쪽에서는 웃는 사이에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내면의 자아들이 보여주는 영화관을 이러지러 다녔다.
2.
80%는 이미 생명을 잃어 버린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가끔 입밖에 꺼내거나 정제된 형식으로 꺼내어 놓으면 언제나 80%는 이미 생명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상상의 세계에서 상징의 세계로 내려오면서 일어나는 소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글이나 보고서를 많이 쓰게 되었다. 점점 소거 현장이 증가했다. 내가 아는 것과 모른 것들 사이에서 내가 느낀 것과 경험했던 것들의 격차가 커져만 갔다.
3.
어린시절이 행복하면 나이가 들면서 무료해진다
라는 말이 있다. 어린시절에 행복했던 기억들은 물론 삶을 안정적으로 가지고 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행복을 위한 안정적인 패턴만을 찾아나서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전정신이나 모험정신은 오히려 어릴적의 힘겨운 역경들이 자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너무나 도전하고 싶고 새롭게 모험하고 싶다. 30세를 넘어가니 사람들이 이제 철좀 들고 나이값좀 하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그런가보다 하고 하는 척은 했다. 그런데 삶을 제대로 사는 것과 '어른처럼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더군다나 어른처럼 산다는 것은 매번 소거의 시점에서 좌절감을 안겨준 사회시스템과 문화에 제도에 익숙해지라는 말인데, 그렇게 적응해버린 이들의 최후는 너무나 따분하고 식상했던 것 같았다.
4.
자기자신을 위한 글은 아무래도 '소설'쓰기가 아닐까요?
라캉에 관한 수업을 듣다가 문득 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누구나 사람은 초자아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그건 당연한 거에요.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윤리, 기대구조에서 멀어지면 '광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데, 그걸 계속 안고 살아가는 사람은 힘들죠.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잘 하지 않은 거에요. 그런데 저도 요즘에는 저를 위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그 방법은 아무래도 '소설'이 아닐까해요" 이야기를 듣다가 정말 그러하다는 생각을 했다.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다 드러내어도 누군가 '그게 진짜에요?', '그건 아닌것 같은데'라고 말할 수 없는 장르는 시나 소설인데, 특히 소설에서는 많은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성격은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아름다운 소설도 있고, 섬짓한 소설도 있고, 즐거운 소설이나 고민을 많이 주는 소설도 있는데 같은 것이다. 자신을 위한 글은 소설이고, 그 소설에서 자신의 모든 세계가 공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써 볼까 한다.
5.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70세까지 궁전 화가였던 프란시스 고야는 자신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때는 5년간 귀가 멀어서 안들리던 시기였다. 고야는 비로소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광기와 이성이 적절하게 묘사된다. 그가 인상파화가라는 말을 듣는 것은 '사실주의에 대한 사실주의'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소거의 방법인데 사실에 대한 사실은, 사실보다 사실 안에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사실이라는 증명이 불가능한) 것들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사실주의에 대한 사실적 접근은 오히려 사실주의를 붕괴시키고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경로를 만든다. 소외에 대한 소외가 소외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듯이, 우울증에 대한 우울증은 우울증을 벗어나는 방법이듯이. 그러니깐 고야를 꺼내는 이유는 이제 나에 대한 소설을 쓰는 모티브로 작용했다고 할까? 나는 아래의 고야의 작품이 너무 좋다. 잠을 자면 광기가 되살아나서 다양한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인생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고야의 다른 작품들 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상을 준다. 그래서 인상주의겠지. 내안의 괴물을 깨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 Francisco Goya,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1797,
6.
'응시'라는 개념은 초자아의 탄생에서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호명'이론도 역시 누군가가 부를 때 내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응시라는 개념에서 나는 신의 응시와 사람들의 응시를 동시에 느낀다. 그리고 어느순간 내가 과거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금 시점의 내가 과거의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타자는, 미래는 항상 현재의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니 타자는 현재를 응시하고 나는 과거를 응시한다. 이런식으로 계속해서 소거되는 시점, 소멸되는 시점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막는 방법은 '응시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그 과거로 돌아가서 '응시'되었기 때문에 잠들어 버렸던 괴물들을 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주체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다양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7.
'가면'을 쓰고 들어가서 '가면 뒤에서' 괴물을 부활시킨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중에 '가면 뒤에서'는 매우 좋아하는 소설이다.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빨간머리 앤은 올컷이 3개월만에 쓴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생활비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깐 올컷의 괴물은 '빨란머리 앤'이 아니다. 그 소설은 '응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잠을 자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가면 뒤에서 올컷은 자신의 괴물을 통해서 그 당시 사회에서 위선적인 가정의 권력 구조를 붕괴시킨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나 여성성, 그리고 그 구조에서 당연하게 기대되는 역할모델들을 여지 없이 붕괴시킨다.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붕괴된 구조에서 새로운 자아가 주체성을 가지고 누구의 응시도, 누구의 호명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일단은 그 구조 속에 가만히 '가면'을 쓰고 들어가서 '가면 뒤에서' 괴물을 부활시킨다. 태어나면서 얻혀진 무거운 구조의 무게, 누구의 아들이고 어디에 살고, 지능이 얼마이고, 어느국적을 가진 사람이고, 남자이고 여자이고. 이것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할까? 잠을 자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을 하는 중.
8.
이성이 살아 있는 시간과 괴물이 살아 있는 시기에, 주인공은 현실에 안주하다가도 문득, 잠들어 버리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모험가가 되는 것.
낭만소설을 쓸 경우, 17세기 초기 낭만주의를 빌어와서 어린 시절에 꾸던 꿈이 현실을 만나 좌절하지만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현실에서 꿈이 이루어지는 스토리가 될 것 같다.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많은 것들을 얻었다는 내용으로 쓰고 싶다. 거기에는 이런 꿈을 비웃는 친구들이 등장하고, 이 꿈을 응원하면서도 현실에 적응해버리는 과거 어린시절의 연인이 있고, 또 새롭게 꿈을 응원하면서 자신도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을 이야기하는 새로운 연인이 등장할 것이다. 배경은 18세기 조선사회 혹은 유럽사회가 될 것이고, 조선사회라면 신분제 하에서 중인정도가 될 것이고, 유럽사회라면 기사정도 될 것 같다. 이런식의 낭만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드라마 추노 같은 소설이 되겠지만 파격보다는 조금 더 아름답게 쓰고 싶다. 그러는 사이에 어린시절 내면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들을 끄집어내어서 쓰면 된다. 이성이 살아 있는 시간과 괴물이 살아 있는 시기에, 주인공은 현실에 안주하다가도 문득, 잠들어 버리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모험가가 되는 것. 스토리를 하나하나 구성해 보아야 겠다.
9.
그 때 '나는 어떻게 생각했어? 어떤 느낌이었어?'라는 해석이 시작되니깐 이건 필시 나를 위한 글쓰기가 되는 구나!
연애소설을 쓸 경우,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미련한 주인공이 캐스팅 될 것 같다. 정신의 깊이가 낮은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주인공이 지혜로운 연인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새로움, 변화, 탈주와 탈선, 희망을 그리고 싶다. 그럼 미련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나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아야 하고, 그 시절에 행동은 그렇게 했지만 생각은 혹은 마음은 어땠는지를 물어봐야 한다. 과거에 나에게 찾아가서 물어봐야 한다. 이게 흥미로운 지점이구나! 나를 위한 글 쓰기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어? 그 때?'가 아니라 그 때 '나는 어떻게 생각했어? 어떤 느낌이었어?'라는 해석이 시작되니깐 이건 필시 나를 위한 글쓰기가 되는 구나! 암튼, 연애소설은 내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을 분할해서 캐릭터를 만들 것이지만, 사실 그건 하나였고 사람은 누구나 이 두 부분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모두가 '인간이 되는 길'에 이른다는 것을 그리고 싶다. 지성과 감정이 따로 놀지 않고, 의지가 제대로 길을 만들어가는 사이에 깊숙히 드러나는 인간성의 향연, 이런 느낌으로.
10.
누구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 자신을 위한 글쓰기의 시간들을.
잠들어 있는 괴물을 깨우는 시간, 나를 위한 글을 쓰는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작될 것 같다. 소설의 형식이든 다른 형식이든. 그런데 이렇게 시작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적절한 힐링이 된다. 아 인간은 역시 창조적이고, 무엇인가에서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구나 한다. 어린 시절에 내면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들을 다시보기 하면서 글들을 적어가고 장면들을 만들어가야지. 인생은 현상학적으로 현재를 살고 해석학적으로 과거를 바라본다. 이제 해석의 시간이 도래했고, 소거되었던 기억들을 부활시킬 때가 왔다. 누구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 자신을 위한 글쓰기의 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