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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05. 2020

스텐리하우어워스를 읽다 _ 교회의 정치학

김동춘 교수님과 함께하는 스텐리하우어워스 읽기


0. 들어가기


스텐리하우어워스를 읽은지가 3개월이 지났다. 교회의 정치학으로 부터 시작된 어떤 '교회됨'의 개념과 감정은 점점 메킨타이어의 공동체주의와 하워드요더의 재세례파의 논리의 의해서 완성되어 가는 느낌이다. 물론 스텐리하우어워스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이해 혹은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하나의 해답으로 인정할 수는 있을 것 같다.


https://brunch.co.kr/@minnation/1723



1.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교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설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교회'로 메타포를 가지고 오는 스탠리하우어워스의 전략은 무엇일까?

종교개혁이전까지만 해도 '구원'은 카톨릭교회가 그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후에는 '개인의 신앙'으로 치환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개신교의 구원론은 교회론에서 떠나와서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가능하다는 '자유주의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재세례파나 스텔리하우어(이하 'SH')는 다시 교회로 돌아아오는 것을 볼수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나의 견해는,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을 규정해 온 수 많은 근본 이미지들에 도전한다.'

교회가 '정치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구조'와 관련되어 있다. 구원에 대한 교회의 질서들은 세상 가운데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미래에 대한 변화를 외치는 선지자적인 행보였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세속적 정치 체제 아래에서의 구원은 사실 '진보'나 '보수'의 중간 어디쯤이다. 그러나 교회는 '초월적인 구원론'을 외치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로서, 그 자체로 기존의 정치질서를 벗어나게 하는 '정치적인 행위'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콘스탄티티누스 이전에 교회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과 대립하는 형태로 존재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권세를 무너뜨렸다'우리는 사랑의 통치를 거부한 세상 안에서 십자가를 따라 형성된 공동체로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



2. 구원과 믿음

구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시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SH의 구원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세례파의 구원관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재세례파는 믿음을 believe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belonging으로 이해한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구원이 결정되어져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셰례파들은 구원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구원의 증표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공동체로 살아간다. 그래서 보여지는 교회는 곧 보여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을 시연된 서사로 이해하는 것을 순교보다 더 강력하게 증언하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의 구원의 증거는 그 공동체에서 보통 행했던 삶의 방식인 '순교'로 보여졌다. 이것을 SH는 '정치적 행위'로서 그 체제에 반항하는 것을 의미했다.

cf. 그러나 이러한 SH와 재세례파의 논리는 오히려 '고백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공공신학적 정치참여를 오히려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부분은 물론 교회론에서 조금 더 발전된 방식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SH를 비판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3. 포스트 christiandom

SH의 논리는 모더지즘 시대의 교회의 개념과 역할이 포스트모던시대에는 다양한 진리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적 시대에서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구원'의 주제는 자신들이 가지고 온 정통적인 신학적 관점을 고수하며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자유주의적인 진리관'을 가진 다양한 학문적인 체계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는가?'라는 고민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몽주의 이후에 계몽주의, 모더니즘 이후의 모더니즘의 시대에서 '교회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SH는 '교회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교회를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북미신앙의 관점에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의와 윤리적 추구, 교회됨, 구원론이라는 주제는 사실 시대적 착오적인 혹은 시대적으로 복고적인 느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 순수한naive 것이 되었다. SH는 이러한 북미신앙의 관점에서 '휴머니즘적 동질화'는 사실 교회의 교회됨이 조금씩 소멸해서 마침내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염려를 하고 있다.

SH는 교회가 교회될 때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라고 주장하다. 그럼 포스트 크리스천돔에서 '교회됨'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다니고 계속해서 교회됨의 내용들을 찾아가는 것이 SH의 저작들이다.



4. 하우어워스와 해방신학

해방신학은 총체적 해방, 부분적 해방 등과 같은 진보적인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진보해 가고 있고, 점점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해방신학에서는 구원으로 연결하고 있다.

사회의 발전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프로세스와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SH가 볼 때는 해방신학이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은유'는 실존자체만으로 매몰되기 때문에 결국 구원론은 '교회'도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도 아닌 사회진화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이 가지고 있는 '정치학'과 '교회의 정치학'은 '정의'에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 해방신학에서의 정의는 사회정의와 사회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에, SH는 정의는 '교회됨이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정의'이다.

따라서 교회가 추구하는 정의는 사회변화를 전제하고 실행하는 '정의'가 아니라 교회와 성경, 공동체 안에서 '정의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의 뜻을 품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그 자체로 세상과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


5. 종교의 자유

미국에서 말하는 '자유'와 교회에서 말하는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

종교의 자유는 미묘하기는 하지만 유혹이다. 법적인 메커니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거나 어떤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식의 완전주의적 믿음을 준다.

기독교는 시민종교로서 포지셔닝을 하는 것이 맞는가? 시민종교라는 것은 '시민적 덕성'에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 사회의 평균적인 도덕성을 저항하지 못하는 것, 기독교가 문화화된 형태의 교회를 말한다.

종교의 자유가 오히려 교회에서 말하는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SH는 말하고 있다.

교회의 정치성은 존재자체인데, 지금 현재의 미국은 종교의 자유로 인해서 그 존재됨 자체를 오히려 침해하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고 보고 있다.


6. 증언의 정치학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가장배제된 사람은 흑인보다 인디언들이다. 신대륙의 발견 이후부터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가장 소외되고 타자화된 대상이다.

1492년에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그 자체로 '타자의 은폐'였다.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볼 때, 자유주의 국가에서 '교회'는 주체인 타자인가?

여기에서 SH는 레슬리뉴비긴이 '영국교회의 타자화'를 보면서 쓴 글들을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증명해 간다. 뉴비긴이 이야기한 것처럼 '재복음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SH가 이어 받아서 포스트크리스천돔 이후에 재복음화의 방식으로 '교회됨'을 다시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증언할 것인가?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전할 것인가? 우리가 전하는 내용이 사실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가치가 담겨진 주장'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치는 사실 '제자'의 삶으로서 완전히 다른 삶으로의 초대인데, 그러한 초대 자체가 '증언에 담겨진 정치적인 메세지'라고 한다면, 자유주의적 시대인 종교적 자유의 시대에 왜 '증언'은 타자화되었는가?

다시 말하면 교회의 정치학은 다시 '증언을 위해서는 교회됨을 확실히해야 하고, 교회됨의 핵심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것이다.


7.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오늘날 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란 누구인가?

시민종교의 하나로서 도덕성을 갖춘 공동체인으로서 시민의 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다른 내러티브를 가진 순례자들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증언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메신저로서 우리는 무엇을 확신하고, 어떤 이야기들을 전할 것인가?





민네이션, 생각

스텐리하우어워스가 보수적이면서 꼰대?같은 느낌으로 '복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주장하는 '공동체주의'적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개인적으로 주어진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설사 그렇게 태어났더라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누군가와 만나게 되고, 만들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것도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져 가는 윤리는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 속했는가를 묻게 된다. 아래 그의 인터뷰에서 본 것과 같이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던 자신의 아내와 공동체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무엇인가?'이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신병혹은 조울증은 다양한 주체들이 한 사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면 정초된 정체성을 갖는 것은 '무엇이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할 것이다.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가지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와 '진보'에 대한 개념에 대한 고민들이 있다. '진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진보'를 보게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추구한 현상학, 인식론의 한계는 '누가 원본인가?'와 연결되어 버린다. 그런 이런 장애물에 넘어지지 않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변화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정리하고 기대하고 또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한국에서 '기독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인 기독교, 정치문화적 변화 속에서 기독교가 뿌리 내려온 현실, 앞으로 변화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진성리더십'의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전도'는 언어의 전도 이전에 '존재의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존재자체가 다른 신념과 삶의 방식을 살아가면서 리더십의 영향력을 끼치는 진정리더십의 경우에는 요구하지 않고 따라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교회도 존재론적으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면 '존재의 강화'는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민네이션, 질문

신앙의 기반이 처음부터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 만들어져 있는가? 혹은 타자에서 출발하였는가에 따라서 기독교를 생각하는, 진리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런 주장에서 볼 때 스텐리하우어워스는 어떤 신앙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 그거 경험했던 것은 무엇인가?

재세례파, 하워드 요더의 주장은 오늘날 우리시대에도 적용가능한가?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문제점들은

증언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증언하는 것들은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담겨있는데, 그것이 개인의 공동체성과 연결되어 전해지면서 증언할 당시에는 또 다른 해석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메킨타이어가 비판하는 정감주의Emotivism의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감정이나 정서를 중심으로 하는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슷하게 은사주의적 특징들이 요즘 많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참고자료 1.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079


참고 2.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1196


참고 3.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8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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