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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May 03. 2020

레비나스 읽기_타자성의 철학 3

타인의 얼굴_강영안 5, 6장 및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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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간까지 레비나스의 철학의 기본적인 부분과 함께 '타인의 얼굴'의 주요한 방향을 보았다. 오늘은 타인의 얼굴 마지막 시간으로 강독회에 맞게, 책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알아볼 것이다. 강영안 교수님의 타자성의 철학의 핵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타인의 얼굴'은 그 자체로도 레비나스에 대한 이해를 깊게 만든다. 그러나 이제 다음시간부터는 '시간과 타자'를 읽으면서 레비나스의 문체를 직접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 이해를 위한 사전읽기 바로가기(링크를 눌러주세요)

1) 레비나스의 철학

2) 레비나스의 싸움


- 이전내용 정리하기

1) 타인의 얼굴_1,2장 

2) 타인의 얼굴_3, 4장



오늘의 순서


1. 아이스브레이킹

2. 오늘 진행 순서 소개 및 기대사항 청취

3. 복습_1, 2회차

4. 각 장별 강독_5, 6장

5. 질문과 토론

6. 소감 및 다음 시간 소개





5장 책임과 대속적 주체

_'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를 통해 본 레비나스 후기 철학


이번 장에서는 다시 존재의 물음이나,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인식론보다 나와 타자의 관계를 다루는 '윤리학'이 제일 철학이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존의 '존재론-인식론-윤리론'을 뒤집어서 반대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 전반의 '존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 나 자신의 고유함과 타인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해보자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 똔느 존재 사건 저편에'라는 후기 저서에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


1.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2.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3.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4. 타인의 얼굴
5.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代贖)의 의미
6.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7.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8.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1.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p 164


레비나스가 말하는 '본질'이라는 뜻의 에쌍스 'essence'는 단순한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자 노력하고 존재를 유지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 레비나스는 '존재과정 또는 존재사건'을 에상스라고 본다. 그리고 그의 저작에서는 이러한 존재를 넘어서서 다른 방식의 윤리적인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윤리학'에 관한 리차드니버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무론적 윤리학은 '무엇이 내가 따라야 할 최고의 법인가?'라고 묻는다면 '무엇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니버가 말하는 책임윤리이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책임이 있으며 어떤 상호작용의 공동체 안에서 내가 내 자신인가?'를 고려하는 것이 책임윤리의 핵심이며 이것은 처한 상황, 대상, 일, 공동체, 도덕적 주체가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고려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먼저 고려한 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나아가는 것과 다르게 먼저 내가 처한 상황과 공동체 안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라서 다른 과정을 겪는다.

니버의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강영안교수는 '책임의 윤리학'으로 본다.

'책임은 자유에 근거한다'라는 1인칭 관점에서의 책임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책임'일 때 자유는 사회와 정치제도에서 '정의'를 기초하는 근거가 된다.



2. 나의 책임과 존재 모험 p166


'나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론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는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이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자기 중심성이라고 말한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이렇나 코나투스, 자기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의 동력인 것이다.

죽음과 소멸에 맞서서 자기 존재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은 서양에서 '희극과 비극, 종말적 위로'가 계속해서 문학적 양식으로 생산되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자기로 돌아가는 운동인 '자기성'과 '자기 동일성'은 주체성의 내면성에 근거를두고 있지만,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이것은 실체가 없고 역사적 과정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물론, 레비나스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 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다시 동일하게 반복되는 방식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타자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고 보고, 존재의 무거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타자에게 나아가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타자는 구원인 것이다.

나의 존재가 지금까지, 지금도, 앞으로도 살아가게 되는 것은 나의 외부, 타인들의 세계,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실체는 나의 내면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삶의 거주지oikos가 된다. 그래서 존재의 노력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인 '거주의 관리' 혹은 '경제'가 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나는 나의 거주지에 타인을 초대함으로써, 즉 환대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살아간다.


사회적경제 특강_오이코노미아의 진정한 의미(홍기빈)



3. 존재 유지 노력과 타인과의 관계 p170


자기성과 자율성을 근거로 해서 타인과 세계로 뻗어 나가는 윤리는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진 타인과 경합을 벌일 수 밖에 없다. 타인을 살인하거나 증오함으로써 이렇나 자유의지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타인은 한명이 아니라 수 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실상 전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

자연에서 자신의 소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동이나, 세계에서 타자를 제거하려는 노력인 전쟁은 따라서 상대방의 개체성과 인격성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근거로 삼는 홉스식의 존재론에서는 '사회계약'을 통한 관계를 정립하려고 한다. 두 주체간의 계약으로 존재들의 전쟁에서 평화가 찾아온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계약은 어느쪽이라도 파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불안감을 이미 잉태한체로 만들어진 평화이다.

이러한 생각의 근본에는 그리스철학이 가진 '다양한 주체를 하나의 근원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을 가지고 있다. 일자를 발견하고 다양성을 일자 속에 환원하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은 진정한 지식에서 찾았다.

본질을 찾아내서 다양성을 본질 속으로 포함시키는 것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려고 했고 이것은 개인사이의 갈등 역이 거대한 역사의 본질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완성된다고 보는 사상으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1인칭적 관점에서 파생된 욕구, 이기심이 국가차원을 넘어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건재하며 이것을 바꾸는 길은 1인칭이 있기 위해서는 이미 2인칭이 존재하며, 이러한 관계에서는 책임과 정의가 먼저 수반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나의 자유에 선행된 책임이 있고 그것은 타자와의 정의의 관계, 즉 윤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4. 타인의 얼굴 p176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타인의 출현은 존재유지의 차원을 넘어서 타자를 책임지는 관계로 나아간다. 타자는 외재성이고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발생한 윤리로 인해서 나는 나를 초월하여 타자에게도 나아갈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은 '벌거벗음 가운데 나타나는 얼굴, 자기 자신에 의한 현현, 맥락 없는 의미화, 전체성의 깨뜨림, 낯선 이'이다.

현상학적으로 '벗겨냄을 통한 인식'의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타자의 얼굴은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나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 지식이라는 총체 속에서 구분하고 범주화하여 존재를 표상하고 묶어두는 방식으로는 타자를 이해할수 없다. 타자는 나의 인식 밖에 존재한다.

타인의 얼굴은 언제나 '처음 온 사람'이다.

타자의 얼굴에서도 특히 '눈'은 타자성과 외재성의 핵심이다. 눈을 통해, 타자는 시선을 가지게 되고, 눈을 통해서 나에게 말한다.

타인의 얼굴은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그의 얼굴은 강자의 모습이 아니라 낯설고, 비참한 이방인이다. 타인의 얼굴은 비참함에 처한 이웃의 얼굴이며 나에게 윤리적인 호소를 한다.

타인의 명령으로, 타인의 호소로 인해서 나의 자유가 문제시된다. 타인의 명령과 호소에 복종할 것인가?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윤리는 나의 자유가 문제시 될 때 그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에 부름에 나는 '응답하는 자'가 된다. 응답하는 나는 이제 타자에게 책임을 져야 하고, '내가 여기 있다'라는 것은 타인의 처분을 기다리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5. '타인에 의한,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代贖)의 의미 p184


타인은 나의 기원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초월성으로서 타자에 대해서 갖는 경외심과 책임에 대한 응답은 인간성을 이루는 기본이었다. 타인은 나에게 혼을 불어 넣어주고, 영을 집어 넣어 준다. 나의 호흡이면서 나의 영이다.

내 안에 타자는 타자를 위한 짐을 질 수 있게 키워주는데 이것이 바로 모성성maternite이다.

대속은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이다. 대속은 말 그대로 자리바꿈이다. 자율에서 타율로, 자발성에서 타자에 의한, 능동성에서 수동성으로 옮기는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타자에 대한 책임은 무한하게 설정되어 있고, 타인의 고통 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수브옉툼Sub-Jectum으로 아래에서 떠 받혀 주는 자이다. 타인의 잘못을 나의 잘못처럼 짊어짐으로써 '속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무한책임은 누구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선택받음'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나의 역할은 내가 그 역할(속죄와 대속)을 잊어 먹을 수는 있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리적 주체'는 '메시아'를 말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속하고 고통을 짊어지는 것은 메시아의 역할이고 우리는 그렇게 처음부터 메시아로 만들어졌고, 부름을 받았다.

기독교 전통으로 한다면 우리 모두는 메시아,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는 타인을 위해서 죄를 짊어지고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대신 당하고 있는 구원자이다. 그러므로 주체 개념은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책임과 윤리적 주체'가 된다.


시작 시점의 문제

인간이 스스로를 판단할 때 '나는 원래 이래!'라고 말하는 시점은 어디인가? 아마도 자신의 의식이 생성되어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부분에서부터 일 것이다. 부모님의 일정한 성향이 자신의 몸에도 체화되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일컫어서 '유전'이라고 부르는 지점 말이다. 그 시작 시점을 레비나스는 성경에서부터 가지고 와서 '태초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이기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원래부터 그런게 아니고, 그렇게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이렇게 관계 맺지도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회복의 기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과 탈무드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 회복에 대한 관점이 레비나스 철학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참세기 3장이후부터가 시작시점이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가 시작 시점인 것이다.



6. 대속적 책임의 실현과 비움의 주체 p188


대속적 책임을 진 주체는 타인의 부름에 응답할지 아니면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갈지를 결정해야 한다.

응답과 희생, 환대와 책임은 주는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며 결론적으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내어주는 것이다.

내어줌은 거래가 아니고 순수하게 주는 것이며, 대차대조표처럼 얼마를 받고 얼마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이다. 주고서 잊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나 내어줌은 '선'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참된 사랑에는 나의 계산이나 욕망이 개입될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은 에로스가 결여된 사랑이며 이것은 또한 타인의 배고픔에 반응하는 경제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선이다.

배고픔은 공간적 의미에서 바깥과 구별되면서 비공간적인 바깥을 보여주는 통로이다. 존재와 다르게 초월할 수 있는 통로이다. 타인의 배고픔에 대한 응답이 향유적 주체를 책임의 주체로 바꾸어 놓는다.

'존재사건으로 부터 벗어남'은 이익추구를 벗어나서 순수한 사랑, 기대지 않고 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속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지 말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

어떤 마을에 이기적인 사람과 상대적인 사람이 있었다. 상대적인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것과 똑같이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자기자신을 먼저 생각했음으로 사람들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기적인 사람은 상대적인 사람들을 만나서 이기적인 행동을 했고, 결국 그 마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선한 사람이 찾아왔다. 선한 사람은 이기적으로 변한 상대적인 사람과 살면서 계속해서 희생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주고, 내어줌으로써 이타적인 행동을 했다. 상대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선한 사람의 행동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적인 사람은 선한 사람을 닮아가서 선한 사람이 되었다. 마음은 조금씩 선한 행동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문제는 선한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이 만났을 때이다. 선한 사람은 계속 이기적인 사람 앞에서도 선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 결국 선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은 그렇게 늙어서 죽어갔다. 상대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의 행동을 계속해서 기억했고, 이따금 이기적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가끔 다른 마을에서 이기적인 사람이 오거나, 선한 사람이 오면 그 마음을 그 사람들에 따라서 선한 행동이 증가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이 증가 하게 되었다. 만약 이 글을 당신이 읽고서 선한 행동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당신은 '상대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글을 읽고서도 '이기적인 행동'을 계속하고 싶다면 당신은 적어도 선한 사람은 아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지만 선한 사람의 행동은 계속해서 기억되고 지금까지도 이야기로 남아서 상대적인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7. 제삼자와 책임: 정의와 국가 제도 p193


타인의 범위는 2인칭으로 규정된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바로 내 앞에 있는 타인이면서 저 멀리에도 있는 수 많은 타자들에 대한 무한 책임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제삼자le tiers'라고 말하며 만인에 대한 보편적 책임으로 나아감을 뜻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무한책임은 제삼자에 대한 책음으로 확장되고 평등과 공의에 따라서 정의로운 공존체계에 대한 요청이 일어난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책임은 법으로 전환되어서 체제와 구조, 국가를 통해서 매개된다.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타자를 위한 국갈로 전환된느 것이며 레비나스는 정의로운 국가 구축없인느 타인에 대한 우리의 무한 책임은 그 효력을 잃고 만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의 드라마'로서 국가는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잘못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바깥에서 '일깨움'을위한 비판을 계속해야 하며 '지속적인 혁명'과 '틀의 파괴'를 거듭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는 보편적인 원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구체적인 사안에까지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주체성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숨은 눈물을 볼 수 없는 '행정체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위계질서와 행정체제 안에서 타자의 눈물에 반응해야 한다.

타인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만 야만적인 국가에서나 정의로운 국가에서도 내 앞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의와 윤리를 실현할 수 있다.

1인칭적 '자기중심적 주체'에서 2인칭적 '책임을 지는 주체'로, 3인칭적 '만인의 대한 만인의 책임'의 주체로 발전하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방식까지 제시하고 있다.


8. 응답으로서의 윤리학 p197


인간을 제작자로 보는 목적론적 윤리와 인간을 시민으로 보는 의무론적 윤리와 다르게 레비나스는 '응답자로서의 인간'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리차드 니버나 한스 요나스의 사상과도 맥이 통한다.

인간을 응답자로 보는 관점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을 만든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 윤리로 인해서 그 공동체는 유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책임의 윤리학'은 히브리어 성경과 탈무드에 그 기초를 두고 있고, 행위와 존재 이분법 이전에 원래의 나의 존재에 집중하고 있다.

니버는 조지허버트 미드의 '반성하는 자기'의 개념을 책임윤리로 가져온 반면 레비나스는 현상학을 중심으로 자아를 넘어서는 책임의 주체를 말한다.


한국교회의 주체 설정

예수님은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단지 우상숭배의 차원을 넘어서 맘몸은 소유와 폭력으로 나아가는 이기적인 존재로서 자기 중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다양한 비유와 예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이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세상의 방법은 대부분 맘몬의 방식으로 부터 연유된 것이 많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처럼 '소유'하거나 '노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 존재를 규정하고 존재를 자신의 거주지에 붙밖이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런식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존재'로 상정하고 존재에 대한 경외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자신의 거주지안에 묶어 두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맘몬의 질서인 것이다. 존재를 소유해서 존재로부터 나오는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했듯이, 하나님을 소유해서 하나님의 '신비와 무한'의 예측할 수 없음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안에서 갖히게 되었으며 '선한 일'에만 적용되었고, '성공'에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라는 것은 하이데거의 주체설정과 다르지 않다. 동일자의 논리로 존재를 소유하지만 마치 존재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개인의 인격을 앗아가버리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은 맘몬의 길로 흘러 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레비나스의 말처럼 존재자들의 얼굴에서 무한히 뻗어나오는 신비에 응답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것에서 부터이다.

책임은 responsibility이다. response라는 응답하다와 ability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내가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체여야만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자면 한국교회에서 외면하는 수 많은 사회문제들과 이웃들의 고통에 책임을 지지 않은 모습은 주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이기심을 위선으로 포장한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 주의력을 잃으면 위선이 된다' 이웃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6장 고통과 윤리


타인을 위해서 짊어지는 책임의 주체가 타인의 고통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철학에서 말하는 신의 죽음, 도덕의 몰락, 주체의 죽음의 대안으로서 살펴보자.


1. 고통과 철학
2. 레비나스 철학과 고통의 문제
3. 고통은 쓸모 없는 것인가?
4. 고통의 현상학
5. 변신론의 몰락
6. 고통, 윤리, 주체성
7. 윤리와 고통, 대속적 고통, 나의 고통


1. 고통과 철학 p207


철학에서는 고통의 문제를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철학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대안보다는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을 발전시켰고 인간의 고통을 진단하고 추론과 논리를 통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다.

고통은 언제아 악의 문제와 더불어 신정론의 테두리에서 다루지기도 하였고, 변신론의 입장에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고통의 문제는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 보다는 신의 섭리와 계획의 일부분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고통의 문제

신정론 혹은 변신론의 입장에서 고통은 줄기차게 다루어져 왔다. 고통을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수준에 따라서 하나님의 대한 태도가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통의 문제를 각자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통은 어디서 왔고 왜 오는 것이며 어떻게 사용되는가? 혹은 고통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2. 레비나스 철학과 고통의 문제 p210


필립네모와의 대화에서 레비나스는 '사유의 시작은 이별, 폭력적인 장면, 갑작스러운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상처아 망설임'이라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칸트와 비슷하게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칸트는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 삼으면서,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20세기에 세계대전과 함께 유태인 학살이 보여주는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면서 변신론이 종말했다고 본다.

변신론에서는 고통이 선을 이해하거나 선을 이룩하는데 유용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지만, 레비나스는 고통은 그 자체로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다고 말한다.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체성을 설정할 때 고통을 제외하지는 않고 오히려 고통을 통한 주체의 완성을 말한다. 고통은 의식에 주어져 있고 고통을 해석하고 그것을 타자에 대한 공감과 책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레비나스의 작업이다.

이러한 레비나스의 '고통'에 대한 문제는 줄곧 다양한 책과 논문에서 다루어져 왔지만 '쓸모없는 고통'(1982)이라는 논문에서 출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고통은 쓸모 없는 것인가? p213


고통은 유용성, 생물학적 합목적성, 사회적 유용성, 정치적 목적론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다.

레비나스는 이 과정에 유용함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을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해왔다고 말한다.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고통의 이해는 그 목적을 설정한 사람에게만 유용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통의 현상자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레비나스의 작업이다. 그 고통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왜 왔는지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팬텀싱어 3 푸른학은 구름 속에 우는 데



4. 고통의 현상학 p216


고통은 초월적 통각이면서 내가 담아낼 수 없는 낯선 것이다. 수용할 수 없는 어떤 것 자체이며 범주상으로도 애매하다.

고통은 어떤 성질이지만 칸트가 이야기하는대로 종합이 불가능한 것이다.

고통은 또한 하나의 양태, 존재방식이다. 의식 안에서 수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것이 고통이다.

고통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고통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고 고통을 우리를 굴복시킨다. 고통은 수용성보다 수동적인 수동성이다.

인간은 아무런 준비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고, 감성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악이고 동시에 상해이다. 악성종양이나 신체부위에 부상을 당한 사람은 아무런 경고없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악을 경험한다.



5. 변신론의 몰락 p218


형이상학적 목적론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따라 설정된 초월적 목표가 있으며, 자연과 역사는 비록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며, 고통과 아픔에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통은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 지정해 놓은 존재, 무, 제1원인, 목적성, 무한성, 유한성과 같은 단어들의 연계 속에서는 잘 작동한다. 레비나스는 이것이 작동하는 '이성'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악할 수 없으며 이성과 감성의 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악하며 심어지는 악마적임을 20세기의 경험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독일과 동유럽, 캄보디아에서 드러난 악과 그로 인한 고통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과 악을 이성이 제어하지 않았고 제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논리적으로 변신론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현상에서 실재로 악은 발생하였고 고통은 수 많은 생명들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이데올로기도,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존재하는 고통과 악을 정당화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계속 고민한다 변신론 이후에도 계속해서 신앙과 윤리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6. 고통, 윤리, 주체성 p224


변신론이 무너진 뒤, 존재신학에 기초한 전통신학이 무너진 뒤, 오직 윤리적인 것만 삶과 신앙 그리고 도덕적 선에 의미를 줄수 있다.

고통받은 사람의 외침과 신음은 타인의 즉각적인 행동에 호소하는 행위유발적 행위이다.

고통은 도피의 불가능성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절대적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고통에 대한 외침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나에게 묶여있던 존재가 타자와의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만 실재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위이다.

윤리학적 관점에서 고통이 의미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 의해서 미래로 열려진, 타자로 열려진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의미를 소유하는 방식으로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고 그 외의 도덕법칙데 대한 존경이나 행복, 또는 공동체의 보존과 같은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필요없은 부자들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에서 '윤리적 호소'를 경험한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있을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은 눈감아 줄 수 없는 것, 인내할 수 없는 것이다. 살과 몸이 있는 존재는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응답하는 방식으로 주고 비워내고 바치는 살이 있는 존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볼모로 내어 줄 때, 타인의 고통에 대신할 수 있을 때 타인과 연대할 수 있고 세상은 연민과 동정과 자비를 품게 된다.

주체는 수브옉툼sub-jectum, 타인의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이 세계 아래에서 떠 받치고 지탱하는 존재가 된다. 대속적 고통도 그 자체로는 쓸모 없음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의미는 발생하는 것이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


타인의 얼굴 : 롱 리브 더 킹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은 주민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고 남자주인공은 이러한 여주인공과의 사랑을 통해서 타자의 고통에 호소하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

다리에서 버스가 전복된 사고에서 남자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면서 사회적으로 인간성을 인정받아 결국은 국회의원이 된다.(좀 오래되고 황당하고 구식이기는 하나, 윤리적 주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 윤리와 고통, 대속적 고통, 나의 고통 p229


레비나스 입장에 대한 비판

1. 윤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가?
2. 대속적 고통에서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
3. 타인을 위한 고통만 의미가 있는가?


도덕적 이성을 따르면서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과 타자의 현상학적 호소에 응답하는 것 자체가 윤리인 레비나스의 윤리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타자와와 관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체의 성립은 고통받는 타자 앞에서 일어난다.

대속적 고통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고 상황에 따라서 주어진 현상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존재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존재로 부터 파생된 계약이나 논리가 아니라 존재 저편에 존재하는 그냥 줌, 베풂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스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강연안 교수는 타인을 위한 고통은 어떻게 보면 타인을 위한 고통이 아니었더라고 할지라도 무의미하지는 않으며 고통 가운데서 영원자와 연결되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정도 레비나스의 논리에 대한 반박과 함께 개인적인 고통도 의미있음을 손봉호 교수의 말을 빌어서 하고 있다.


고통을 당해본 사람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론: 레비나스는 철학에 어떤 새로움을 가져다주었는가?


1. 서양 철학 비판과 비판철학의 가능


존재를 중심으로 '1인칭 시점'의 철학은 예나 지금이나 가득하다. 존재의 불안을 구토와 게으름으로 표현한 것도 하이데거의 큰 공헌이지만 오히려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오고, 그래서 더욱 가학적으로 존재에 기대게 된다. 이러한 존재중심으로 철학은 그 동안 노동과 소유를 통한 폭력과 전쟁을 양산해 왔고 이것을 막기 위한 방식으로 계약에 의존하거나 국가에 포섭되어서 겨우 존재를 유지했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동일성의 논리로써 다른 사람의 얼굴을 지움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었다. 레비나스는 오히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책임'으로 서양철학을 비판하면서 존재근거를 현상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타자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2.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나를 먼저 규정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안하다. 오히려 윤리, 타자를 위한 윤리,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가 먼저인 것이다. 그것은 의무론적 당위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원래부터 내제된 지향성이다. 현상학의 지향성과 의식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서만 성장하고 성숙하고 발전한다. 그렇게 인간은 타자를 보면서 응답하면서 어울리면서 살아왔다.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니체와 하이데거까지 타자를 염두해두지 않고 자기의식의 명증성에서, 자신의 깨달음의 확실성에 만들어지는 철학은 결국은 존재에 붙어 있는 철학이면서 자기 자신으로 동일하게 돌아오는 철학이다. 윤리가 먼저라는 말은 주장이 아니라 진리이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태어났다.


3. 신과 종교의 문제


그러나 철학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신과의 사랑에서 지적인 사유가 시작된다. 신은 완전한 타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지 못한 대속과 자비와 은혜를 가지고 있다. 신의 사유 안에서 인간의 사유가 가능하다. 신을 부정해본 사람만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경외함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 신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신을 타자로 받아들일 수 있고, 완전한 무한과 신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과의 합일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종교는 결국 전체주의로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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