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얼굴' 강연을 위한 기본 이해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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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기본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은 역사 전체를 통해서 조망되는 '운동'이다. 거대한 힘, 운명으로서 개별적인 존재자들이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기본적으로 영웅적으로 동참하라고 말한다. 일명 동일자 되기 프로그램으로 존재자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간극을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초월transcendence을 시도하게 된다. Level-up을 하기 위한 시도는 하이데거 철학에서 기본적인 바탕이다. 존재자로 던져진 이 세계 속의 현-존재들은 존재로 귀환하기 위한 레벨업으로서 다양한 참여활동과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헌신을 통해서 초월의 경지, 존재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간극을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초월transcendence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초탈transfora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초탈은 Spectrum의 확장이면서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 이동과 전이의 공간이다. 현-존재 안에서,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존재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미 갖춰진 세상의 질서와 공간의 한계 안에서 빠저나갈 수 없다. 존재자의 자기동일성의 운동은 존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 초월한다고해서 여전히 존재 안에서 존재자의 작은 부분에서만이다. 결국 존재자는 존재에게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 철학은 이렇게 존재자가 존재에 갇혀있지 않고 새로운 탈출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타자'라고 말하고 있다.
타자로 향해가는 과정에서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 비로소 무한히,
신비로운 타자와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타자를 통해서 존재자들은 주체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타자말이다. 전체성의 틀 안에 갖혀있던 존재자들이 외부의 무한성으로 접근함으로써 존재의 감옥에서 무한의 신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자는 곧 구원이고 탈출구이고, 나를 살게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 설정 안에서 타자에 대한 무한 윤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래 영상은 인간이 타자로 나아가는 방식을 적절하게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고 다스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레비나스나 하이데거나 비슷하다. 즉, 존재물음에 대한 고민을 가졌다는 것은 존재가 이미 존재하고 그 존재에 연결된 존재자가 역시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필립네모와의 대담인 '윤리와 무한'에서 이러한 하이데거의 유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하면 '주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된다.
1)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주체의 형성은 존재의 거대함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동시에 시작되며 존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이 군집함으로써 주체는 더 강해진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모두가 존재의 일정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들이 그 존재자들이 모이면 모일 수록 '존재'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존재를 더 많이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바탕에는 '부분의 합은 전체'라는 것이 깔려 있고 이 사상은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로 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기계론적 사고로 치환하는 것을 거부하고 숫자놀음으로 존재의 양이 100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거대한 흐름 안에서라는 존재의 터전으로 들어간다는 신성한?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에서 존재자로, 존재자들에서 주체로 초월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이윽고 주체는 존재를 판단하고 이해하고 소유하면서 더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2)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반대로 존재자들은 존재 안에 갖혀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 안에 갖혀 있는 존재자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리 모이고 결합한다고 해도 여전히 존재 안에서 무한한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치치하에서의 유대인들은 아무리 뭉쳐서 몇백만명이 된다고 해도 결국은 죽게 되는 '존재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유대인이고 하이데거가 독일인인이상 전쟁의 상황에서는 이기고 있는 독일인들과 박해당하는 유대인이라는 '존재의 운명'이 절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감옥을 '하이데거의 감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레비나스는 이 감옥을 나올 수 있게 만드는 열쇠는 오직 '타자'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존재의 감옥에서 아무리 초월을 해 보았자 높이 올라갈 수 있을 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나 타자로 향하는 길은 마치 감옥문을 여는 열쇠가 감옥 안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어 그 문을 스스로 열고 나가는 것과 같다. 타자를 향해 의식과 시선의 지향성이 발휘되는 순간 타자의 얼굴은 자신에게 구원으로 다가온다.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서 무한한 세계로, 열려진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구원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신성한 얼굴'임과 동시에 책임을 지고 경배하고 숭배해야할 무한이 된다. 레비나스의 무한의 개념은 이렇게 타자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존재의 사슬을 벗어버리는 '주체'의 탄생을 만들어 준다. 결국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인간이 만들어진 방식이었고, 성경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구도였다. 하나님의 존재도 대타자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인간은 규정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타자를 향해 의식과 시선의 지향성이 발휘되는 순간
타자의 얼굴은 자신에게 구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