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얼굴_강영안 1, 2장
1장
레비나스 철학의 기본적인 내용으로 성장배경과 지적훈련의 과정, 유대인으로서의 성장경험 및 '주체개념'을 중심으로 주요 사상을 개괄한다.
2장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핵심인 '주체'개념이 서양철학사에서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알아본다.
3장
레비나스의 초기철학 중 '존재론적 모험'을 다룬다. 고통, 죽음, 에로스의 3가지차원에서 타자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루어본다.
4장
향유, 거주, 노동, 타인의 얼굴 등 '전체성과 무한'의 중심 내용을 다룬다.
5장
레비나스의 후기철학으로서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를 통해 대속적 책임의 개념과 타자의 고통에 대한 레비나스의 주장을 들어 본다.
6장
초기부터 후기까지 '고통'개념을 중심으로 주체와 윤리를 되짚어 본다.
1. 레비나스의 지적 종교적 배경
2. 레비나스의 철학적 배경
3. 레비나스 철학의 프로그램 : '주체성의 변호'
4. 주체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규정
레비나스는 예힐레비나스와 드보라 구르비치의 삼형제 중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남동생 보리스(1909)와 아미나답(1913)은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살해 당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레비나스는 '존재 물음'의 시작을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죽음의 문제로 보게 된다.)
6살 이후부터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며 기초적인 윤리, 초월적 관점,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배우게 되었다.
레비나스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한 유대교 '하시디즘'에서는 기도와 영적 체험을 강조하였으나 이를 반대해서 '미트나게딤'은 외적이고, 객관적이며, 정확학 텍스트 강독과 이해를 강조한다.
레비나스는 성인이 되어서야 의사 앙리 네르송의 소개로 위대한 탈무드 철학자인 쇼샤니와 교재했고 탈무드를 중심 유대인 교사 양성학교인 '동방이스라엘 사범학교' 교장으로 1946년부터 일하게 되었다.
쇼사니는 탈무드에 관해서 최고의 동료이자 스승이었고 레비나스는 이 과정에서 탈무드 번역을 통하여 유대교의 정수를 서양정신으로 해석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1957년부터 해마다 피리에서 유대 지식인들에게 탈무드 강의를 하게 되며 다양한 책들을 편찬하게 된다. 탈무드는 레비나스에게 이성의 터전이나 사유가 시작되고 해석되는 장소였다.
이후 볼쉐비키 혁명에서부터 히틀러의 통치까지 반유대주의를 온몸으로 겪은 레비나스는 히틀러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피해당한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재조명하며 '악을 근절하기 위한 철학'을 시작한다.
반셈족주의, 곧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유대인을 적대적 타자로 보고 그타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사상이며 이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적대적 타자로 보고 그 자타를 제거하고자 하는 사상이며 이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타자 배제 이데올로기의 특수한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타자 배제는 나의 '존재'와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데서 출발한다_p23
타자에 대한 철학은 반유대주의를 경험한 레비나스에게는 생존의 문제였고 근본악을 제거하기 위한 처방책으로서 인류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아울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의 의해서 '인간의 조건'으로 다루어진다. 한나아렌트는 타자배제의 근본악을 '악의 평범성'으로 규정하며 사유하지 않음을 통해 국가와 조직에 귀속된 개인의 행위는 전체주의의 구성요소가 된다고 주장했다.
성경과 함께 레비나스는 러시아 문학을 즐겨 읽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을 읽으면서 철학적 사유의 기초를 놓게 되었고 '인간적인 것의 의미' 혹은 '삶의 의미'가 철학이 추구하는 행위라면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을 읽는 것은 칸트와 플라톤을 공부하기에 딱 좋다고 말했다.
"철학은 모두 셰익스피어에 관한 명성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집에서는 러시어로 말하고 러시아 문학을 말하면서 레비나스는 러시아 문학을 통해서 유럽문화에 입문했다. 특히,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책을 통해서 레바나스는 사유를 정리할 수 있었다.
레비나스에게 사유의 시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 망설임, 폭력장면, 지루함의 경험'이지만 그것이 하나로 집대성되어 물음이 되고 고뇌가 되는 것은 '책'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세계 안의 존재이면서 책으로 향한 존재라고 말할 정도이다.
1919년부터 러시아 정권을 잡은 공산당의 의해서 시온주의와 유대인 종교교육이 금지되었고 레비나스는 이 때 가족으로 떠나 1923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해서 철학공부를 시작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모리스블랑쇼를 만나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1975년 '블랑쇼에 관해서'라는 책을 쓸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레비나스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철학의 선생님들인 '샤를르 브롱델, 모리스 알바하, 모리스 프라딘느, 앙리카트롱'을 만나서 수학했으며 사상이 형성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프랑스철학에서 레비나스는 베르그송의 철학을 접했고, 베르그송을 통해서 영원과 실체성보다 시간과 지속, 통시성, 존재 저편의 초월이라는 주제들을 배웠다. 특히 시간개념에 대해서 무한성의 시간, 선한 것의 탁월성 자체라는 것을 통해서 이후 '시간과 타자'를 통해서 정리한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프라이부르크에서 알게된 하이데거의 철학은 레비나스의 지적배경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되었다.
1) 외재적 주관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주관은 의식과 시선의 주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초월론적 주관이라고 부르는 메타인지에 의해서 매번 종합된다.
1927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장에링에게서 현상학 공부를 시작한 레비나스는 현상학에 깊은 인상을 받고 후설에게 직접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1928년 프라브르크로 간다.
후설의 마지막 학기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후설의 집에도 방문할 기회를 가지면서 후설 철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1929년 소르본대학으로 현상학 강의를 하기 위해서 온 후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며 그의 강의를 번역한다. '데카르트적 성찰 : 후설이 조새개하는 현상학'이라는 제목으로 1931년 프랑스에서 출판될 때 레비나스의 역할이 컸다.
후설의 현상학에 관학 책으로 유명한 '이념 1'(순수현상학에 대한 이념과 현상학적 철학)에 대한 서평을 쓴다.
1930년에는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후로도 후설에 대한 다양한 글들을 쓰다가 1949년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존재를 발견하면서'가 출판된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현상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초가 되었고 이후에 출간된 '존재에서 존재자로', '시간과 타자', '전체성과 무한'은 이러한 현상학적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1929년 3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프랑스철학자와 독일 철학자의 만남에 참여하게 되면서 다양한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하이데거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과학적 합리성에 앞선 인간존재 이해에 기반을 둔 존재사유를 목격한다.
1927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서 레비나스는 미리 하이데거의 이론을 접했다. 후설과 함께 하이데거의 철학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하이데거 철학이 가지고 있는 동일자 중심의 존재론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하이데거가 독일 나치의 전위철학자가 되기 전에 이미 그의 철학에서 이러한 동일자 중심의 전체주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의 분리에 대한 분류는 매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물음에서 존재자는 존재에 귀속된다고 생각하지만 레비나스는 존재자는 타자의 존재에 귀속된다고 본다. 귀속을 넘어 사실은 자신의 유한성이 타자의 무한성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 생성, 의미, 생명, 지속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자
하이데거 사상에서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 존재자는 그대로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하이데거는 사물, 인간, 동물, 우주와 자연 뿐 아니라 신까지도 존재자로 보고 있다. 그와 비교하면 존재는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서 드러나게 하는 가장 포괄적인 지평이자,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게 하면서도 그것들 간의 조화와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근거이다.
현-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보는 전통적인 인관관을 비판하고 있다. 전통적 인간관은 인간을 동물이란 지평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본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규정된 젷나된 환경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본능적인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만 타나난다. 이에 반해서 인간은 최대의 포괄적인 지평인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이기 때문에 존재자들을 자신의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만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현실에 던져진 존재 즉 현-존재인 존재자이다.
처음읽는 독일현대철학_'마르틴하이데거, 존재의 소리에 귀기울이기'_박찬국
레비나스는 자신의 경험 자체에서 '전체성'을 경험했기 때문에 현상학적으로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밝히는 작업을 평생의 과제로 삼는다. 두 동생의 학살과 자신도 전쟁에 참가했다가 겨우 살아남은 경험들은 나치가 가진 전체주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자체가 만들어낸 파국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전체성과 무한'에서 전쟁의 폭력과 서양철학의 정신이 사실은 내재적 동일자들의 순환운동이었다고 폭로한다.
인간은 전체의 일부분이며 전체인 존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서양철학에서 다양성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적 다양성이나 집합의 개념으로 다른 사람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성격의 다양성이다.
전쟁 가운데 스스로 내미는 존재의 얼굴은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이라는 개념 속에 고착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다른이, 타자는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근데 주체에서 존재를 절대화한 독일관념론과 주체의 죽음을 말한 프랑스철학 또한 비판한다.
주체의 존재화나 주체의 해체나 사실은 그것을 집행하는 당사자는 역시 전체주의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무한한 신비인 타자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서양철학을 뒤집에서 윤리적인 주체, 책임을 갖는 주체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타자의 요청에 환대하면서 자신을 열어 놓을 때 주체는 진정한 주체가 된다.
전체성과 무한' 중에서
이 책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환대로서의 주체성을 드러낼 것이다. 이 가운데서 무한의 이념이 그 완성에 도달한다. 지향성 속에서 사유는 대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지향성은 의식 그 근본 차원에서 규정하지 않는다. 지향성으로서의 모든 앎은 이미 최성의 불일치인 무한의 이념을 전제한다.
무한한 타자에게 책임을 지는 주체는 먼저 '향유하는 주체'이다. 향유하는 주체는 우리가 실재로 사는 삶에서 먹고, 마시고, 관계하고 즐기면서 개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즐김과 누림을 통해서 하나의 개체가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한다.
레비나스는 자기성의 성립, 개체성의 성립없니는 타인의 영접과 타인에 대해 책임지는 윤리적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향유성jouissance은 인간이 세계와 접촉하는 근본적인 방식이면서 이성보다는 신체와 감성에 더 기인한다. 향유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고 먹고 마시고 삶을 영위해가고 싶은 기본적인 본성이다.
그러나 향유성은 항상 불안함 가운데 있다. 지금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내일도 가능한지는 항상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향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주와 노동을 하게 된다.
거주를 통해서 직접적인 사물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세계의 위협에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집은 그 자체로 편안함과 향유의 공간이면서 레비나스에게는 타인의 따스함을 맛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지배와소유의 차원을 열어주며 환경이 가지고 있는 무규정성과 익명성을 해체하고 생수단으로 사회적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은 기보적으로 경제적 존재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욕구인 besoin을 가진다. 이것은 결핍을 전제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향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욕구이다.
이와 다르게 형이상학적 욕망으로서의 욕구인 le derir'가 있다. 원래는 타자에 대한 욕망인데 전체주의나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쾌락주의 등은 이러한 욕망을 자신이 직접 실현하려고 하는 동일자의 논리로 환원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통해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따름아닌 타자의 얼굴의 현현이다. 얼굴은 일종의 '계시'이다. 내 자신의 노력이나 기존의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윤리적인 요청을 하는데, 이때는 자유의 증진이 아니라 정의의 실현이 문제가 된다. 내가 응답하는 것이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응답하지 않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는가?이다. 그래서 얼굴의 호소는, 얼굴에서 나오는 계시는 윤리로 연결된다.
타자의 얼굴은 향유하는 개체에게 완전히 초월과 내재성인 '낯섬'이다.
'고아'와 '과부'로서 타자의 얼굴은 보편적인 인간성을 열어주는 길이다.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 것으로 나의 정체성을 삼지 않고 타자와 동등한 관점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간다.
타자는 나와 동등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동등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는 것은 사실 내것을 지키고 싶은 사람일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만큰 동등하게 보거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동등하게 만들고 싶은 것은 모두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동일자로서의 자아개념, 주체개념이다. 이러한 관계는 타자의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 타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계시는 나의 무한한 향유성을 제한하고 내가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한다. 그래서 타자의 존재 때문에 자아는 윤리적이 된다.
섬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자신의 제국을 다른 섬을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확장하려고 하지만, 타자성의 철학은 섬들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그 자체로 연결되는 새로운 무한성의 자유를 맛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인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주체의 중심으로 삼는 자아는 죽음에 대해서 불안하게 된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타자의 안위와 생존을 위해서 봉사하는 주체는 타자의 미래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초월한다. 주체의 죽음이 아니라 타자의 생명이 중심이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에로스의 관계로서 두명의 타자인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새로운 타자가 탄생하면서 출산성으로 인해 사멸성은 주체의 중심에서 멀어진다. 태어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자의 타자가 태어나고 태어나고 태어나서 계속해서 이 인류를 존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성애를 토해서 어떤 다른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한다고 주장하며 성관계를 통해서 여성적인 것은 감추어진 것, 전적으로 타자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의 비판이 많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출산을 위해서 존재하는 연약한 타자로 규정되는 것 같다. 이 부분은 논의할 사항이 많다.)
감추어진 것은 '애무'로 드러난다. 애무의 결과로 감추어진 것들은 드디어 '타자로서의 나'인 출산한 자녀에 의해서 형상을 입는다.
결론적으로 과거, 죽음의 주체성이 아니라 미래, 생명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체는 향유성을 가지고 기본적으로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가지만 내제적인 욕망으로서 형이상학적인 기대를 가지고 내면성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주체가 타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 주체는 끊임없이 자기 순환적 운동으로서 사멸성으로 시간의 흐름에 의해서 다가가게 되고, 결국은 주체를 죽고 만다.
타자의 신비, 타자의 얼굴, 타자의계시에 의해서 동일자의 논리를 가진 주체는 비로소 무한한 내재성으로 도달하게 되고 사회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는 이것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애매모호함과 다양성, 신비로움으로 이 세상을 열려진 세계로 놓을 수 있게 된다.
'주체'를 주제로 한 철학은 프랑스의 샤르트르나 영국의 흄의 주체 비판에 대한 흐름과 같이 독일에서는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고전철학과 자연주의와 역사주의를 비판하며 초월론적 주체를 내세운 후설현상학에서 드러난다.(P46)
독일 고전철학이 태동할 수 있었던 플라톤전통과 기독교전통, 독일관념론의 철학적 기반인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등장한 니체에 의해서 주체 개념은 1차적으로 비판을 받는다.
후설현상학을 계승하면서 주체 문제를 다룬 하이데거에 의해서 니체와 같이 서양철학정신 전체를 비판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형이상학적 주체'
개신교 기독교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주체'
후설 현상학 '초월적 주관을 가진 주체'
하이데거 '현실에 주어진 존재자로서 주체'
니체 연기설 '관계론적 주체'
라캉 주이상스 '욕망하는 주체'
푸코 후기구조주의 '구조 안에 주체'
레비나스 타자철학 '윤리적 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