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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Apr 18. 2020

레비나스의 철학 1-1

'타자의 얼굴' 강연을 위한 기본 이해 1


0. 들어가기


철학에 관해서는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어쭙짢게 이것저것 배웠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로 꿰어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이다. 대학교때부터 윤리와 무한, 시간과 타자 등등 계속해서 레비나스의 철학을 어깨넘어로 배워왔는데, 이제는 내가 이해한 만큼 레비나스의 철학을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해석, 죽음에 대한 생각 등등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레비나스의 철학을 함께 풀어보고자 한다. 가장 좋은 강의, 특히 어떤 철학자에 대한 강의는 그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에서 사용한 방법으로 강의하는 것이다. 그러니깐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윤리적인 인간'을 기반으로 '윤리적인' 강의가 되도록 고민하고 있다. 일단 오늘은 레비나스의 철학을 들어가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한 몇가지의 에세이를 적어보려고 한다.




https://brunch.co.kr/@minnation/965


https://brunch.co.kr/@minnation/1210


타자와 인상



1. 왜 윤리인가?


존재론-인식론-윤리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내가 셀 수 있는 개체들을 앞마당의 쫘~악 널어 놓고 개체들 간의 우열을 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류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계층을 만들고 구분했다면, 플라톤은 존재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신들과 영들에 대한 부분을 '원형'으로 삼아서 '이데아'로 넘겼다.


이렇게 존재들의 계층화가 일어나면 이제 존재들이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증명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존재론은 존재의 개체를 세는 작업이고, 인식론은 그 존재들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정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존재론에서 '인간, 자연, 동물'이라는 개체들을 구성했다면, '인간은 고등동물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라는 인식론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문, 명제는 포함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존재론과 인식론을 거치면서 존재는 자신이 있을 자리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받게 된다.


이러한 존래론-인식론의 작업이 끝나면 비로소 나오게 되는 것이 윤리론이다. (혹은 가치론으로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윤리론으로 본다) 윤리론은 존재가 인식된 후에 '시간'개념에 따라서 그럼 그 존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정해져야 한다. 이것은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 위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나는 고등 동물이면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에 복종하고 동물들을 다스려야 한다'라는 윤리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 특히 독일의 관렴론은 인식론 기반의 '이성'중심으로 사고가 매우 활발했기 때문에 '앎'에 있어서 사물을 분석하고 구조화하고 정의내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자연스럽게 헤겔, 칸트에서도 보여지는 앎의 위계질서는 모르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정당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레비나스는 서양철학 전체를 뒤집는 거대한 작업을 시작한다.


현상학에 관하여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돈한 뒤에 눈을 뜬다. 그럼 밀려오는 사물의 다양한 색감과 온도와 형태가 우리 눈을 통해서 대뇌로 전달되고 전두엽에 맺혔다가 시냅스를 통해서 기존의 구체적인 폴더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이렇게 빨아들인 정보를 분류하다가 보면 세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이런 작업을 1달정도 해보면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렇데 '왜 창문은 저렇게 생겼지? 왜 탁자는 네모난가? 왜 탁자 다리는 4개이고? 나는 왜 이게 문제라고 느끼는가? 나는 아침햇살을 맞으면 기분이 좋은데 왜 그렇게 되는가? 친구들의 웃음소리는 때론 즐겁고 때론 듣기 싫은가? 텔레비전은 왜 멈추지 않고 계속 방송이 나오는가?'와 같은 다양한 물음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이런 고민을 하다가 '아 그냥 관두자. 이렇게 고민한다고 머 답이 나오나?' 이렇게 되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현상학의 시작점에 선 에드문트 후설은 이렇게 정리된 정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후설은 몇가지의 중요한 단서를 찾아내는데 그것은 '지향성', '초월론적 주관'이다. 먼저 지향성은 우리가 눈을 뜬 순간부터 우리의 '시선'은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 지향을 멈출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우리의 시선은 무엇인가를 향하고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인식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의 '의식'은 지향성을 갖는다. 아무것도 안하고 멍때리기~를 실천할 때도 사실 의식은 멍때리기를 위해서 다른 의식들을 차단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인가를 볼 수 밖에 없고,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후설은 이러한 지향성이 닿았다가 분류되는 것들을 '주관'이라고 불렀고 아래의 4개의 주관을 찾아냈다.


1) 외재적 주관  
외재적 주관은 자아 외의 존재하는 지향성이 닿아서 인식된 자연, 사물, 공기, 건물, 우주와 같은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주관에 의해서 그것들을 계속해서 인식된다.

2) 내재적 주관
내재적 주관은 외재적 주관이 인식될 때 내 안에서 느껴지는, 이해되는 것들이다. 몸이 아프다거나, 마음이 좋다던가, 머리가 아프던가, 시원하다라는 등의 여러가지 인식들이 내재적 주관을 만든다.

3) 수리적 주관
수리적 주관은 수학적 주관과 같다. 외재적 주관과 내재적 주관도 마찬가지로 몇개가 있는지, 어떤 배열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느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려면 수리적 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4) 타자적 주관
타자적 주관은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외재적 주관과 다른 부분은 다른 사람을 사물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것들을 인식하는 것처럼 타자도 나처럼 다른 것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의식적인 능력이 있으나 그것도 역시 내 안에서는 '그와 그녀에 대한 주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현상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들어오는 주관의 양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질도 달라지고 목적도 달라지고 관계도 달라진다. 그런데 후설은 이러한 4가지의 주관을 모두 총괄하는 주관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월적 주관'이다. 모든 주관들을 통솔하는 메타인지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주관은 매 순간마다 현상에서 지향성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조합하고 분류하여 '나를 만들어가고 세상을 만들어 간다' 따라서 초월적 주관은 계속해서 합계를 내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러한 초월적 주관이 어느정도 축적이 되면 결국은 그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 그 공간에 그 시간에 있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정한 의식이 생기는데 후설은 이것을 '세계의식'이라고 불렀다. 흔히 말하는 '세계관'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오히려 초월적 의식보다 앞서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세계의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초월적 주관을 그 세계의식에 맞출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바로 여기서 '윤리'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떡밥이 던저졌다. 초월론적 주관을 꺼낸 순간 헤겔의 절대정신이 생각나게 되고, 타자적 주관에서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 떠오를 것이다. 수리적 주관에서는 계몽주의에서 현실을 분할하고 숫자를 매김으로서 지배할 수 있는 기계와 사회구조를 만들었다는 것과 내재적 주관은 샤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의 기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떡밥들 가운데 레비나스는 과연 어떻게 이러한 사고를 뒤집을려고 했을까? 사뭇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윤리론을 맨 먼저


레비나스의 기획은 기존의 '존재론-인식론-윤리론'을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그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책임을 지는 윤리론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기존의 인식론이 가지고 있는, 서양철학사 전반의 인식론적 전체주의를 배격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동일자 주의에 대해서 다름으로 시작되는 주체를 설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에고이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역사가 발전했다면, 반대로 '이타적인 주체'가 만들어가는 '타자의 철학'을 통해 기존의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사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윤리론을 제일 먼저 놓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 부분을 자세하게 다루어 보자.


필립네모와 대담을 담은 윤리와 무한은 아주 쉽게 레비나스에 다가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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