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밤에 갑짜기 잠에서 깨어났다. 추운 겨울이라서 이불을 움푹 뒤집어 쓰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방에 들어 온것 같다. 귀신인 것 같기도 하고 부모님인 것 같기도하고 혹은 도둑인가? 이러는 사이에 의식은 점점 꿈속으로 들어가고 어렴풋한 어제의 기억은 아침에는 말끔하게 없어졌다. 단지,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의 인상만 남기고.
김춘수의 꽃은 한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시이다. 시에서는 하나의 몸짓이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꽃이 된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럼 꽃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을 때는 꽃은 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식 속에서 해석되고 누군가를 통해서 '상징'으로 불러져야만 존재하는 사물들은 불러질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제일 쉽기는 하다. 내가 이름을 부여하고 그렇게 부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알튀세르의 호명이론과도 통한다. 지나가는 젊은 친구한데 "학생~"이라고 부르는 순간 지나가던 사람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학생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된다. 김춘수의 '꽃'은 후설의 제자이자 레비나스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사상을 많이 떠오르게 한다.
김춘수_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산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 인식을 못한다고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인식론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자기자신이 중심이 된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과의 경쟁은 피할 수가 없다. 나를 부정하는 다른 사람들의 침입은 내가 얼른 인식을 많이 해서, 더 많이 알아서 굴복시키거나 힘을 더 키워서 힘으로 압제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적게 가진 사람을 움직일 권력이 생긴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로 서양인식론의 자연스러운 발상인 것이다.
그저 있다. 사람들이 그저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지향성을 가지고 돌아보지 않아도 그저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인식 과잉이 되지 않고 타자들에 대해서 열려진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면 그저 있는 사람들과 같이 나도 그저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인식의 감옥에서 벗어나서 그저 있어도 충분히 사랑받는 존재이고, 이해받고 정의내려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윤리론을 첫 번째로 가기 위한 힌트가 나온다. 기존의 인식론 중심의 규정의 권력을 벗어내고 무규정의 타자들 속에 나도 타자로 존재하는 것 말이다. 우리는 누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서 여전히 존재하고, 그저 있다. 여기에, 우리의 자리에, 우리가 처한 시간에 말이다.
3. 타자의 얼굴
본격적으로 윤리론으로 넘어가보자. 이제 타자의 얼굴을 보자. 햇살의 움직임에 따라서 상대방의 얼굴의 그림자가 달라지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눈을 깜빡이고, 입술을 움직이며, 온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 얼굴을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는 얼굴을 정의내릴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니게 된다. 무엇인가를 정의내리려면 일단은 우리의 머리속에, 현실 속에서 그 대상을 멈춰 놓고 하나하나 따라가지면서 묘사하고 종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움직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 움직이고 그 사람의 눈이 깜빡거리고 눈동자에서는 다양한 알 수 없는 무의식이 언어들이 쏟아져 내린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자의 얼굴은 신비이다. 신비는 몽롱하고 아름답다는 것과 다르게 정의 내릴 수 없음으로 항상 의문으로 남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물음, 존재하는가의 물음은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면 존재와 존재자의 틈이 생기고, 그 틈 사이에서 게으름, 구토, 울음, 웃음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철저히 관계적이다. 바로 타자와의 관계말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에 대한 물음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은 '나'라는 사람이 이미 사람들 속에서 존재해야만 가능한 질문이다. 만약 타자가 없다면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한나아렌트의 박사학위논문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나타난 사랑개념'에서 나온다)
타자의 얼굴은 항상 존재의 물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얼굴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청한다. 타자를 통해서 나는 나에 갖혀 있지 않고 비로소 존재의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다. 스스로 주체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 보다는 타자를 통해서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인류가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진실로 상대방의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대화를 경청하는 사이에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인간 존재의 신비함을 경험한다. 그것은 나 스스로도 나를 정의내릴 수 없음이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미래는 열려진 신비가 된다. 타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신비가 미래를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타인의 얼굴을 지우고 인식의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이 세상이 아니라 타자의 신비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려진 세계로 초대받은 타자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지금과는 많ㅇ리 다른 세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