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Sep 28. 2020

레비나스의 싸움  1-3

'타자의 얼굴' 강연을 위한 기본 이해 두번째

4. 자유 vs. 정의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향유하는 인간으로 놓거나 소유하는 인간으로 놓거나, 어쨌든 서양철학의 주체 개념은 테두리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자기자신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비판한다. 생각하는 존재인 코기토(데카르트)도 그 생각을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권력의지를 기본으로 하는 힘에 운동을 조망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니체), 구조 안에서 움질일 수 없는 인간을 벗어나는 상대적인 자유를 인식하고 규정하고 만들어가는 것도 결국은 자기 자신이며(푸코), 상징의 질서와 상상의 질서 가운데 실재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고(라캉),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데아와 현상계를 나누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며, 종류와 범주를 나누어서 종합하고 4대 원인을 밝히는 것도 '자기 자신이 것인다.


feat. 나르시스의 꿈

존재를 규정하여 주체로 만드는 방식, 혹은 만들어가는 것을 주체로 놓고 보아도 역시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정립하는 것이 당연한 서양철학을 김상봉 교수는 '나르시스의 꿈'이라고 부른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규정하는 정신인 것이다. 이것을 '홀로주체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의 정신을 꾸짖으면서 동양의 정신은 '서로 주체성'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정립될 수 있는 주체성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제일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방향성은 바로 개인의 '자유'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로부터의 자유를 초월의 관점에서 보고 도약하는 주체를 설정했다. 그리고 자유의 증진을 위해서 존재의 근원으로, 존재의 운동으로 다가가되 그 존재를 움직이고 규정하고 명령할 수 있는 '주체'를 설정하여 결국은 서양철학을 정복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기준의 준거점은 내가 아니라 '타자'라고 말하다. 타자로부터 나의 주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정립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의 자유가 중심이 되면 이것은 종속의 논리밖에 안된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정의'로 놓는다. 다시 말하면 타자에게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윤리'적인 관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자유가 우선인 이상 정의가 실현될 때는 나의 권리로서의 정의가 실현되지만 정의가 우선이면서 '타자와의 정의'에서는 결국 타자의 정의를 지키기 위한 '나의 윤리'가 설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윤리를 설정하는 주체는 바로 나지만 그 윤리는 나를 지키기 위한 윤리가 아니기 때문에 설정되면서도 계속 나는 타자로 나아가게 되면서 '존재'의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유가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윤리가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주체성'인 것이다.


자유가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윤리가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주체성'인 것이다.



5. 유한존재자 vs. 무한타자


결론적으로 하이데거의 사상은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존재'에게 다가나는 것 같지만, 존재 안에 갖히게 되는 '유한존재자'가 되어 버린다. 버트란트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에서 '부자들은 행복하지 않은데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가?'라고 말한다. 우리가 소유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 그 순간에는 자신의 주체성이 존중되는 것 같고 자신이 계속 성장하는 것과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재의 감옥이 더 커져만 가는 것과 같다. 소유한 것들은 많아지고 아는 것들이 더 많아질 수록 존재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로부터 주체는 계속해서 타자로 나아간다. 타자는 얼굴의 신비에서부터 모든 미래가 신비로 열려진 무한이다. 무한과 다가가는 주체는 계속해서 무한을 맛보고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면서 잠이 든다. 자기 자신에게 쌓여 있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을 벗어난 타자들에게 열려진 무한의 세계에서 '향유'는 인생의 이미와 깊이와 생의 기쁨들로 가득차게 된다. 향유를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윤리'가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정의가 윤리로 계속해서 쌓이는 순간마다 관계는 더욱 안정되고 행복한 지속성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향유하는 존재이면서 타인과 함께 노동하는 존재이면서 세계를 계속 발견해 가고, 무한으로 향하는 가운데 새로운 타자인 자녀들을 만나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유한존재라로 남을 것인가? 안면 무한한 타자로의 여행을 시작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유한존재라로 남을 것인가? 안면 무한한 타자로의 여행을 시작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그림일기를 작성해보았습니다 :)


이전 07화 레비나스의 싸움 1-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