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후에도, 20년 후에도 동네에서 너 지나치면 아는 척할꺼고 너네 할머니 장례식도 갈꺼야~!
그러니까 너도 우리 어머니 장례식에 와! 동훈은 지안이 짜 놓은 계획을 뒤집는다.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어둠속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지안에게 지안은 뛰어오면서 말한다. "슬리퍼 어쨌어?" 지안이 마음을 쓰면서 가까스로 선물한 '슬리퍼'를 동훈이 없는 사이에 치워버린 지안에게 동네사람 동훈은 뛰어와서 물어본다, 아니 소리친다. 슬리퍼 어쨌냐고?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심사를 기다리는 동훈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 같은 지안은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낸다.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 쓰고 회사를 나가는 것.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높이로 정해지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인가 허탈감과 비인간화를 느낀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귀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천한가? 어느덧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위치가 정해놓은 사회적인 규약을 스스로 충실하게 따르기로 한 부하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나만 그런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위아래가 어디있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모두가 같은 곳에서 태어나서 같은 곳으로 가고 있을 것을 말이다.
사회적 위치에 갖힌 지안에게 동훈은 소리친다. "슬리퍼 다시 사와!" 평생 볼 사이로 지안과 동훈의 관계를 설정하고 어디서 보아도 아는 사이가 되고 싶은 동훈. 어쩌면 그는 이 사회가 바라고, 역사가 기대했던 가장 평범한 사람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역사의 전형'같은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무너져가는 사이 에서 겨우 그 공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사회는 겨우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사이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슬리퍼 타령을 하면서 사라져가는 동훈을 바라보는 지안
동훈은 자신의 평범함을 있는대로 내 뱉어놓고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겨진 지안은 묘한 감정, 아니 요동치는 감정에 휩싸인다. 저 사람은 누구지? 어떻게 이 시대에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거지? 이런 생각에 지안은 자신을 의심하다가 불현듯 결정한다. '보통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이 좋은 것같다는. 마음을 돌리고, 눈시울이 빨개지는 사이에 동훈은 사라진다. 언제나 그랬지. 보통사람들,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진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에 꼭 필요한 공간과 시간에 그들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한번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보지 못한 지안에게 동훈은 너무나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한다. 10년후에도 나는 너를 볼 꺼고, 부담스럽고 쓸쓸한 관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관계로, 만나면 즐겁게 인사할 수 있는 관계로 만나자고 말이다. 우리 인생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일상의 언어로 하루하루의 삶을 즐겁게, 아니 평범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해관계로 맺어지거나, 목적이 같거나, 어쩌다보니 같은 공간에 머무르게 된 사람들 말고, 진짜로 일상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안에게 불현듯이 찾아온 동훈의 삶은 감당할 수 없이 커다란 것이었지 않았을까?
슬리퍼 사와!라는 말에 돌아보는 지안의 눈빛,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결국 동훈의 아내는 동훈의 회사 대표, 도준영과 바람이 핀 것을 스스로 실토했다. 그리고 주먹이 깨지라고 문을 쳐댔던 동훈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아작났다. "왜 그랬냐고!!! 그 새끼랑!!" 외치는 동훈 앞에 동훈의 아내는 아무말도 못한다. 서로 흐느껴우는 사이에 그 상황을 듣고 있는 지안은 같이 흐느낀다. 어떤 조건이 갖혀지면 행복하다는 사람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관계'라는 복병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음에도 불가항력적인 불행의 신호들을 계속 쏘아 보낸다. 인간의 나약함과 시간의 허무함 속에서 사회가 굴레 씌워논 자식과 남편, 아내와 보호자라는 규정 속에서 머물다간 사람들의 상처는 어떻게 할까? 동훈은 결국 이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전국수석이었지만 속세를 떠난 겸덕을 찾아갔다. 모든 것들을 들은 지안은 이내 동훈의 마음이 읽혀져서 계속해서 뒤척인다.
지안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어쩌면 그 선물을 받은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같은 방향이라면 내가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그 사람이 나도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좋겠다는 것을 내표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큰 문제에 봉착하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관계에서 누군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 그 사라진 사람들 때문에 누군가가 계속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깐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사라질 것인가? 드러날 것인가?와 같은 것이겠지.
지안은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에게 대답한다. "그 사람 잘 하고 있어요!" 할머니는 연신 그 좋은 사람 잘 있냐고 물어본다. 잘하고 있는 사람들. 잘하고 싶은 사람들. 잘할 수 있는 사람들. 사람들 속에서 산다.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눈물을 더 많이 흘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