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거야 네 번이면

나의 아저씨 #6 착한 사람

by 낭만민네이션
인생에 날 도와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요



지안은 불쌍한 눈으로 보고 있는 동훈의 시선을 피한다. 100번은 넘게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사람을 죽인 애'로 자신에 대한 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인생에서 불쌍함을 느껴본 사람은 알고 있다. 누군가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품는 다는 것과 불쌍하다는 동정을 받는 사람의 마음이 천차 만별이라는 것을. 불쌍하다고 누군가를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동정심으로 가득한 '남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내 안에 흐르고 있어'라고 생각하겠지만, 가만히 있는데, 지금까지 잘 걸어왔는데 불쌍하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갑짜기 주인관계처럼 느껴지는 시간.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끼는 시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래서 불쌍한 눈으로 응시당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연민은 그 사람과 자신이 달라야만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공감'은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 그러니 이 시대에, 이 세상에 공감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안을 도와준 사람들은 많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불쌍해 여기면서 자신에게 동정과 연민으로 몇 번의 착한짓을 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지안은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 지나면 곧 싸늘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지안은 사람이 동정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는 4번이라고 생각했더랬다. 지안은 동훈에게도 그 4번이 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다 똑같다. 동정은 언제나 같은 수준에서, 같은 범위에 그친다. 지안이 평안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말라가는 자신의 눈물샘을 더이상 마르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냉소'였다.


스크린샷 2020-06-14 오후 2.30.09.png 딱! 4번. 사람들이 동정을 연민으로 베풀 수 있는 수준.



착한 거야 네 번이 어디야



그런데 아저씨, 동훈은 달랐다. 항상 자기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동정하는 사람을 지안은 처음 만나본다. 늘 싸늘하게 식어가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동정'이라면 그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같이 있는 사람들도 왠지 스스로를 불쌍해 하는 사람하고는 같이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냉소의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동훈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여기는 동훈이 4번이나 동정을 했다는 것, 그러니깐 자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동정을 했다는 것은 앞으로 쭉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착한거다 4번이면, 그런데 그 4번을 넘어가면서 부터는 동정이 동정이 아닌게 된다. 사람들은 항상 4번에서 그치지만 스스로를 동정하는 인간에게는 불쌍함으로 동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 같은 공감으로 동정하는게 된다. 자기에 대한 연민이 상대방에 대한 연민으로 느껴질 때, 이것도 공감이기는 하다. 자기 안의 감정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는 것이니. 그래서 불쌍한 인간들이 만나서 서로 동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40이 지나면 대부분 스스로를 동정하게 된다더라. 아무도 자신을 동정해 주지 않은 시간이 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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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고맙다고 사주는 거야


"내 인생이 네 인생보다 낫지 않고, 너 고맙다고 사주는 거야" 동훈은 동정이 아니라 고마움을 느낀다. 그 동안 자신에게 해준 것에 대해서, 자신을 굳이 가려주기 위해서 모든 것을 뒤집어 쓴 지안에게. 자신을 뒤에서 욕하는 후배들 보다 아무것도 덕을 보지 못했지만, 자신을 생각해 준 지안 때문에 자신은 조금은 위로를 받은 것 같아서. 고맙다고 사주는 것이다. 누군가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는 항상 자신이 평가받았을 때일 것이다. 훌륭해요 라던가 잘했어요 라던가, 멋진대요라고 하는 말들은 모두가 평가하는 말이다. 촘촘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자신을 관찰하고 응시하고, 권력을 있거나 평가할 수 없는 자리지만 평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칭찬을 가장한 평가이다.


반대로 '고마워요, 감사해요'라고 하는 말은 오히려 다른 출처에서 나온다. 평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느끼는 것. 그러니 고맙다는 말에는 당신으로 인해서 내가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주변에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과 '훌륭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라. 그럼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은 멋지게 가려놓고 그에 맞는 평가를 하는 자신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거꾸로 하고 있는 것이다. 빈껍때기 인간들에게 나오는 이런 쓸모 없는 평가의 잣대는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있는 방에서 그 정점을 드러낸다. 아무도 평가할 게 없음으로, 결국은 자신을 평가하게 되어있다. 자괴감 아니면 자아도취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들은 '자괴감'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동훈은 고맙다고 말한다. 내 주위에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지금을 나타내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자괴감 아니면 자아도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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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모르지만 고맙다는 말에 편안함을 느끼는 지안은 자신의 이름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갔다. 지안, 평안함에 이르는 말 '착하다', '고맙다'라는 말은 얼마나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가? 그렇기 때문에 지안은 오롯이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해 주는 사람 앞에서 지안은 마음을 열어 놓고 무엇인가 내일에 작은 희망이 생길 것 같은 엷은 미소를 띄게 되었다. 사람이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기 시작하면 얼굴이 먼저 알고, 표정이 먼저 그것을 말하기도 전에 드러낸다. 오롯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이 표정과 얼굴의 흐름은 다른 사람에게 꼭 전염되는 특징이 있는 게다.



이거 할머니 갖다 드려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전해주는 동훈에게 느껴지는 이 따뜻함은 머지? 아저씨는 아저씨다. 오빠가 아니라 아저씨다. 그래도 인생 더 살아 봤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챙길 줄 아는 아저씨. 그 아저씨가 다른 사람을 너무 챙기다 보면 불륜도 일어나는 법이다. 적당한 만큼만 챙길려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외로움과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다른 사람들에게 갈구하지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그 연민에 도취되는 것이 아니라 연민을 도리어 희망으로 놓으려면, 죽음에 대해서도 열려 있어야 한다. 죽음을 두려워 한 나머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 자기 안에 분명히 다른 사람을 불러 오게 되어 있다. 전해주고 나서 동훈은 급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연민의 대상을 지안으로 놓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기 때문에 자신도 바람을 피운다라는 자기 연민의 발로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 불쌍해지기를 선택하는 것. 이런게 어른이다. 스스로 불쌍해질 수 있는 용기가 어른이다.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별로 없다. 이거 너 먹어가 아니라 '할머니 갖다 드려'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이 없다. 동훈이는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쓸쓸한 인간이다. 이런 인간을 우리는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쓸쓸해 할 줄 아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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