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Aug 16. 2020

왜 사람들은 무책임해질까?

책임감에 대한 짧은 에세이

왜 글을 쓰게 되었나


편하게 글을 써보자. 살다보면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하게 된다. 아버지가 책임감이 없다는 둥, 대통령이 책임감이 없다는 둥, 연인과 헤어질 때 책임감이 없다는 둥. 그렇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책임감이라는 단어 안에는 어떤 개념들이 서로싸우고 있는 것 같다.


요즘들어서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유난히 이 시기에 말이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책임감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삶을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인가를 책임지려고 할 때 내 안에 일어나는 다양한 생각과 고민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았다.


respose + ability


먼저 책임감을 responsibilty라고 하면 respose와 ability의 합성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재밌는 논리구조가 만들어진다. response를 응답한다라고 보면 이것은 응답을 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바로 '의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의 의도가 현실의 문제나 요청에 대해서 반응할 것이지 아닌지에 따라서 책임을 질 것인가 아닌가가 어느정도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ability의 영역이다. 만약에 현실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따른 해결책을 만들고 무엇인가 자신의 시간이나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막상 투입되었다고 할지라도 효과가 없으면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책임을 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책임감은 결국 의도response와 ability의 조합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의도가 있고 그에 따른 역량이 뒷받침이 될 때 실제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강철비 2를 보면서 더 생각이 든다. 

 


의도는 불순, 역량은 높을 때


이제 두가지의 결합은 몇가지의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의도가 있는데 역량이 부족하거나, 역량이 부족한데 의도만 있거나. 혹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역량이 없을 때나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역량이 부족할 때. 다양한 경우의 수들이 나온다. 몇가지만 살펴보자. 일단, 의도가 불순한데 역량이 높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현실에 책임을 지기는 하지만 그 책임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현실의 문제에 반응은 하는데 자기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보는 대부분의 리더들은 이런 경우가 많다. 의도가 불순하고 역량이 높은 리더들은 결국 조직을 갉아먹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자기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음으로 불순한 의도의 리더가 조직이나 공동체를 붕괴시키듯이, 자신도 그 공동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허물어져 가는 것이다. 결국 불순한 의도를 가진 리더는 역량이 많기 때문에 다른 조직으로 옮겨갈 것이고, 또 거기서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조직을 허물어트리고 옮겨 다닐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책임을 진다고 해놓고는 결국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떠나는 유형이 되어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의도가 불순하기 때문에 역량은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책임지지 않게 되고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조금씩 잃어 버리게 된다. 자기 인생에 실패의 경험도 축적하게 된다.


의도는 순수, 역량이 낮을 때


또 한가지 문제는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의도는 순수한데, 역량이 낮을 때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결과는 같고 과정은 다소 애매해진다.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책임질수는 없지만, 의도는 순수했기 때문에 그 조직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이런 리더가 있다면 조직은 서서히 수면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되면 기존에 능력없이 순수한 의도를 가진 리더는 그 의도가 변질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의도도 불순해지고 역량도 낮아진다. 인생은 어느덧 50살을 바라보게 되고, 이런 사람의 눈빛은 그 안에 구렁이 몇마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게슴츠레한 눈빛이 되어 버린다. 결과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역량이 높은 사람이 리더를 맡을 때와 비슷해진다.


의도는 불순, 역량도 낮을때


당연히 이런 경우는 스스로 도태되고 사람들이 점점 없어진다. 그런데 한가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처음에는 '자기중심성'이 가득한 불순한 의도의 능령은 막 성장하던 시기가 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는 자기중심으로 파고들어가버리고 역량도 결국 떨어지면서 말 그대로 간신이 되거나 겨우 자기 자리 지키고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사람의 얼굴빛은 잿빛 보다 더 어두워진다. 우리 사회에 잿빛 얼굴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자기중심성?


나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자기중심성'이라고 본다. 주위에 청년인데도 자기중심성으로 똘똘뭉쳐 있는 친구들을 본다. 자기자신이 가장 먼저이고 자신의 욕구와 편리함이 인생의 우선순위인 청년들은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꼰대가 되어간다. 눈빛도 얼굴도 점점 어두워진다. 자기중심성 때문에 다른사람을 배려하지 않게 되면서 목소리도 커지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친구도 점점 없어지지만 현실의 문제나 해결책에 대해서도 어두워져 버린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왔을 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서 해결할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자기가 해볼려고 한다. 그런데 잘 안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하는척하면서 하지 않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한다'라는 공식이 이제 자신의 도그마가 되어 벌린다. 결국 자기중심성을 가진 사람의 최후는 자기 안에 고립이다.



나는 잘하고 있나?


자기비판을 위해서 글을 쓴다. 나는 잘하고 있다. 가끔 사람들과 싸울 때가 있다. 자기중심성이 가득한 사람과 만나서 엄청나게 비판을 하고 싸우는 과정이 생겨난다. 그러면 결국에는 나는 그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못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의도로 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자기중심적이 되어 간다. 비판하기 위해서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더니 결국 같은 종착역에 도착하게 되는 결과가 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그리고 중립적인 사람이 살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된다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의 핵심이다. 나도 지금 공유지의 비극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이것을 막기 위해서, 의도를 순수하게 하고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타성일 것이다. 나에 대해서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충만한지 계속해서 살펴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하루에 10분만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하면 더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배워서 남주자'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소격화'이론을 통해서 문제의 핵심을 주변부로 밀어놓고 가장 중심을 텅 비어 놓았을 때 해결책이 만들어지고 오히려 함께할 공간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어쩌면 '나'라는 자기중심성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자기 중심성을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조금더 도와줄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의도도 순수해지고 역량도 높아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제 삶으로


의도를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능력을 키우는 것도 어렵다. 이 두가지를 모두 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이기적인것도 같고, 경쟁심이 너무 넘쳐나는 것도 같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더 맞는 삶인 것 같아 보인다. 현실주의를 가지고 현실에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미 이런 고민을 하는 순간 이렇게 살수는 없다. 무엇인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의도와 능력의 합으로 볼 때 어느순간이나 어느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어떤 삶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것이 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자기 문제로 돌아오면서. 그럼 나는 삶에서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나에게 순수한 의도가 잘 살아 있는가? 내가 정말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고민들을 계속해 본다. 자는 시간이 더 늦어질 것 같은 저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요일 오후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