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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민네이션 Oct 07. 2020

문화정체성과 세계화5_정체성 정치

행정대학원 공공정책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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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고 말할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언제부터 한국인이었을까? 어떤 조건이 있으면 한국인인가? 보통은 '부모님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적인 것인가? 국민국가가 탄생하면서 만들어진 발명품은 아닌가? 오늘부터는 기존에 논의해왔던 '국민이 아니면 이니간이 아니다'라는 루소의 논의를 발전시키서 정체성 정치의 영역까지 나아가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2139



1. 인간-국민을 규정하는 법-정치구조


인간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관계구조는  '인간이 되어야 국민이 되고, 국민이 되어야 성을 인정받고, 정치적인 권리를 얻으며, 종교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인종적으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형성된다. 집합적인 혹은 논리관계는 말끔하게 구조화가 가능하지만 과연 맞으까?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것이 뒤집어진 집합을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는 동일한 권리와 평등이 모두를 '법-권리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로 균질적인 정체성으로 소급해 버렸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균질적인 정체성을 넘어서는 개인에 대해서는 체제의 바깥, 국가의 바깥, 정치의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원래 자연적인 집합은 이와 같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이것이 뒤집어 진다.


그래서 루소는 Sleeping sovereign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민국가가 등장 해서 국민이 되어야만 인간이 된다는 논리에서는 '국가=법=권리'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국가가 상정한 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은 법으로 테두리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서 모든 주권자들은 국가 앞에서 잠든 것과 같은 '효력없는' 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주권은 인권들을 흡수해서 더욱 커져버린 것이다. 결국은 인간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은 국가의 법 안에서 정치적으롤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럼 어떤 일들이 발생하게 될까? 당연히 법의 바깥에, 정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호모사케르(저주받은 인간)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이다.


법으로 부터 밀려난 인간은, 국민으로부터도 밀려난다.



2. 혐오의 정체성, 법-정치의 구조


범주의 집합적 혼동은 결국 '국민이 되어야 인간이 된다'라는 구조를 양산하고 고착화시킨다. 집합 혹은 논리 관계가 뒤죽박죽되면서 '법-권리'의 논리가 흐트러지는 '역사-정치'의 실제적인 구조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범주와 집합의 역은 To make sovereign sleeping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침묵하도록 구조화'를 이룬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집합의 역에서는 이미 그 민주주의에서의 국민은 인간들 중에서도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차별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정치화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전칭을 사용하면서 특정집단을 표준으로 하는 '법-권리'를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는 것이다. 침묵은 '강제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원래 집합에서 뒤집어진 비틀어진 구조가 된다.


3. 정체성 정치


정체성 정치는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1960년대 혹은 70년대 이후로 여러 형태로 사용되어 왔지만,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이 용어는 여성운동, 미국의 민권운동, LGBT운동, 내셔널리즘 운동, 탈식민 운동 등의 출현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인간/국민이라는 균질적 정치주체와 인종/성별/종교/문화/신체특성 등 동질화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 사이의 균열/갈등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혐오사상으로 이어진다.



https://jacobinmag.com/2018/08/mistaken-identity-asaid-haider-review-identity-politics






4.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1971), <정의론> 법문사 2003

    

롤스는 '정의의 원리'를 탐구하면서 공정함에 대한 정의를 공리주의자들과 반대편에서 진행한다. 롤스는 공정함을 가지고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 안에서 일관적인 방식을로 '정의'를 제시한다. 불평등은 정체성에서 오는 것이라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다른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발로 롤스가 이야기한 '공정함'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체성 정치'는 '법과 정치'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국민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그 테두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롤스의 고민처럼 법적인 장치 안에서 '사회 미풍양속'이라던지 '공공성'의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방식은 이미 그 자체로 적과 동지를 나누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새로운 공정함의 원리들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국민국가의 구성원리 제공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약자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하자는 논리였기 때문에, 롤즈의 대안은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매우 이질적인 발상이었다.  



      => 공정함(fairness) 의 정의 <-> 공리주의 (균질적 행복과 효율적 추구)

           제1원리 : 기본적 자유의 평등 배분

           제2원리 :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기회균등’과 ‘격차시정’으로 해소

      => 당사자인 개별 도덕적 인격체 사이의 판단과 합의로 구성되는 정의

      # 법과 정의의 차이라는 고전적 정치철학의 비판 (정의를 구성한다?)

      # 자유주의(노직)과 마르크스주의(맥퍼슨)의 비판 (반자유주의/시장주의)       


    -  반전운동, 공민권운동,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 국민 내부에는 다양한 정체성과 사회경제적 격차가 상존, 국민의 평등?

      => 헌법 상의 국민=추상적 개인?  천상의 평등조항….지상에서 어떻게 실현?

      =>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국가’가 시정한다? 역차별과 자유 훼손

      => 인간의 손으로 정의가 가능한가? 라기보다는, 인간이란 설정/실존 가능한가?





5. Joan Scott, Parité : Sexual Equality and the Crisis of French Universalism (2005) <성적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인간사랑, 2009


    - 1982, 선거입후보자 중 동성비율 75% 이상 금지법안 => 위헌판결

     =>  2000, 프랑스 헌법 3-5 => ‘의원/선거공직에 여성/남성 동수화를 법률화’

     => ‘남녀동수법’ 성립 => 선거인명부 남녀동수 위반시 처벌

     => 헌법에서 말하는 보편인권(인간의 평등) 위배

     => 시민은 단일한 개인이므로 어떠한 범주적 분할도 할 수 없다

     => 페미니즘의 딜레마 : 성차의 무화를 목표,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몫을 요구?



    -  자유, 평등, 형제애(fraternity) => 자유, 평등, 남녀동수(parité)

     => 시민-보편인간의 이원성(duality) =>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됨

     => 자연적 구분과 추상/보편 = 시민/인간, 법/자연…. 사이

     => ‘인간’(추상, 무색무취)과 개개인(구체, 성/인종/종교…) 사이

     => 대의/대표(representation) :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 사이의 간극

     => ‘인간’의 재정의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원래 ‘둘’인 인간…그렇다면 “몇”?


https://redream.tistory.com/161


6. Mark Lilla,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필로소픽, 2018)


- ‘인간’이란 관념을 효력정지시키기 = 비우기

     => 위계적 논리질서 : 하나의 범주 아래 여러 ‘정체성 identity’를 포함

     => 위계적 논리질서를 교란시키기 : 범주 자체의 성립 불가능성에 주목

     => 인간이 본래적으로 남/녀로 구분되어 있다면 단일한 인간은 불가능

     => 마찬가지로 인간이 본래적으로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다면?

     => 보편적 인간의 형상을 누더기로 만들어 법규범을 패치워크화하기

     => 규범/예외의 틀이 아니라, 규범에 예외를 대질시킴으로써 질서 자체를 교란


-Mark Lilla,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필로소픽, 2018)

     => ‘정체성 자유주의의 종말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NYT, 2016.11.20)

     => https://grayecon.com/365 (미국 대선 직후의 칼럼)

     =>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다양성 수사(diversity rhetoric) 비판

     => 미국시민/보편인간의 전통적 규범을 옹호


     => 두 가지 사고방식 사이의 대립에서 어떤 함의를 끌어낼 것인가?





참고사항


정체성 정치란?


‘정체성 정치’는 성별, 종교, 인종 등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나뉜 집단이 각 집단의 권리를 요구하는데 주력하는 정치로, 미국의 여성·성소수자·유색인 운동의 특성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개념이다. 정체성에 따라 받는 억압이 다르며, 각자 자신이 받는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 ‘비슷한 억압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끼리 연대해야’ 한다는 것이 정체성 정치의 핵심 주장이다.


개인주의 3세대


‘정체성 정치’ 개념은 1970년대 미국 민권운동기에 처음 탄생했다. 1960년대 초·중반에는 주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란 단체를 필두로 한 반전 운동, 흑인 해방 운동이 일어났다면, 1960년대 말에는 여성해방운동, 성소수자운동 등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에서 ‘여성’, ‘성소수자’, ‘흑인 여성’으로서의 공통된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란 용어 자체가 처음 명문화된 것은 1977년 흑인 여성들의 공동체인 ‘컴바히 강 공동체’에서였다. 그들은 “겉보기에 개인적인 것으로 보이는 흑인 여성들의 경험”이 “인종적, 성적, 이성애적, 계급적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정치”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흑인 집단 내에서는 ‘성적 억압’을, 여성들의 집단 내에서는 ‘인종적 억압’을 느낀 흑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특수한 경험을 발화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라는 도구를 택한 것이다. 민권 운동이 저문 후에도, 정체성 정치는 크게 각광받았다. 끊임없는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인종, 민족, 종교 구성이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여러 정체성을 포괄하는 좌파 운동이 형성되지 못했고 정체성 정치는 미국 내 소수자 집단의 권리 신장에 일정부분 기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체성 정치는 미국 자유주의, 진보세력 전반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뉴욕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복스』, 『이코노미스트』와 같은 자유주의 성향의 매체부터 『레프트 보이스』, 『자코뱅』과 같은 진보, 사회주의 성향의 매체까지 연일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기사·기고문을 싣고 있다. 런던에서 발간되는 맑스주의 잡지인 『역사 유물론』 또한 정체성 정치를 검토·비판하는 글들로 계간지 한 호를 가득 채웠다. 최근 미국에서 한 맑스주의자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어긋난 정체성: 트럼프 시대의 인종과 계급』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오늘 날까지 미국 소수자 운동의 주류로 자리매김해온 정체성 정치가 왜 이러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일까? 이 글은 정체성 정치가 미국에서 비판받게 된 과정과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 정체성 정치는 비판받게 되었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2016년 대선 이후 급물살을 탔다.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 당시 일관되게 ‘정체성 정치’라는 카드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마지막 유리천장을 깰 사람’이라 칭했으며, 연설이나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상호교차성’과 같은 최신 페미니즘 개념을 인용했다. ‘성공한 중산층 백인 여성들만을 위한 페미니스트’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지를 굳히려고 한 것이다.


그의 지지자들 또한 클린턴에 대한 지지로 수렴되지 않는 정치는 아무리 진보적인 것처럼 보여도 결과적으로는 성차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며 버니 샌더스에 대항했다. 민주당 전략가이자 클린턴의 측근이었던 피터 다우(Peter Daou)는 “샌더스의 (진보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 샌더스는 25년간 의회에 있었던 백인 남성”으로서 “기득권층”에 속하는 반면, 클린턴은 “궁극의 성별 장벽을 깨려고 하는 여성”으로서 “기득권에 반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 또한 “젊은 여성들이 샌더스를 지지하는 건 유세현장에 젊은 남성들이 많기 때문”이라며 샌더스를 지지하는 여성들을 모욕하기도 했다.


클린턴은 이처럼 여성들을 공략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경선 당시 실시된 공동여론조사 결과, 클린턴은 샌더스에 비해 20%나 뒤처지는 38%의 여성 지지율을 얻었으며, 45세 이하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더욱더 적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대선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클린턴은 대선에서 역대 최악의 성차별주의자 후보인 트럼프와 맞붙었지만, 여성 지지율은 54%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2012년 대선 당시 오바마를 뽑은 여성 유권자의 비율과 비슷했다. 이와 같은 대선 결과를 두고 미국 내에서 정체성 정치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정체성 정치는 이미 진보적 운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며, 심지어 백인 민족주의 세력, 극우 세력의 결속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쉽게 구금되고 있고,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성소수자들이 일상적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양한 소수자가 받는 억압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체성 정치가 미국인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2008년 공황을 계기로 변한 미국 민중들의 사회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 공황 이후 성별, 인종, 민족 등 정체성과 상관없이 모든 민중들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었고, 이에 민중들이 본질적인 문제는 본인의 삶을 낭떠러지로 미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특히 부모 세대와 달리 경제 호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1981년생~1996년생)는 이를 더욱더 절박하게 인식하고 급진화 되었다.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YOUGOV’가 2016년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29세 이하의 젊은이들 중 43%가 사회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 36%가 자본주의에 대해 비우호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의 민중들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근본적인 개선을 원하고 있는데, 정체성 정치가 이를 실현시켜 줄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시종일관 ‘정체성’을 내세워 온 자유주의 세력이 소수자의 삶을 개선시키는데 기여하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불만에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했던 오바마는, 유색인들의 삶의 조건을 전혀 향상시키지 못했다. 오바마는 긴축 재정을 실시해 복지 예산을 삭감하고, 그 돈으로 구제금융 자금을 마련해 금융 자본가들을 공황에서 구출해주었는데, 이는 열악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있는 다수 흑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클린턴 또한 자신이 억압받는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월마트 사외 이사 시절에 여성 노동자들을 탄압했고, 영부인 시절에는 가난한 부모에게 주어지는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등 가난한 여성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쳤다. 미국의 민주당 자유주의 세력은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개선할 의지는 없으면서도 공화당과 구별되는 진보적인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민중들은 이러한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 염증을 느낀 것이다.


정체성 정치, 온건한 체제순응적 운동으로 귀결되다


그럼 이제 정체성 정치가 주로 비판받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미국의 사회주의, 진보 세력은 정체성 정치가 민권운동 시기의 급진성을 잃고 체제순응적 운동으로 귀결되게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민권운동 시기에 반자본주의라는 공동의 기치 속에서 탄생한 정체성 담론이, 반자본주의라는 지향을 상실하면서 각 소수자 집단의 권리 신장 운동으로 파편화 되었다는 것이다.


『시애틀 위클리』란 매체가 아사드 하이더와 한 인터뷰 기사(「정체성 정치에 대한 한 맑스주의자의 비판」)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사회주의, 반자본주의가 좌파 운동의 핵심 담론으로 기능할 당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정체성 정치는 노동자계급 내에 백인 남성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 성소수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주의 성향 잡지 『자코뱅』의 로저 랭카스터 또한 1960년대 후반 민권운동 당시, 정체성은 개인의 변하지 않는 고유한 특질이 아니라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가지고 있는 특권에 맞서 싸우기 위한 일시적인 무기로서 채택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각 소수자 집단은 무상교육·보편적 의료보장·공공주택 등 정체성의 문제를 초월하는 요구안을 내세웠으며, ‘보편적 인간 해방’의 목표를 지향했기 때문에 정체성의 문제로만 매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명맥이 신자유주의의 돌풍으로 끊기게 되면서 정체성 정치 또한 급진성을 잃었다. 『역사유물론』지에 실린 「최근 논쟁에 대한 맑스주의자의 개입」에 따르면, 정체성 정치는 점차 ‘각 소수자 집단의 특수성을 인정해달라는 요구’, 즉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요구’로 기울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정체성이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정체성이 핵심적인 정치적 수사로 떠오면서 ‘해방’은 점점 개인주의적 목표로서 여겨지기 시작했다. ‘우리 흑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의 이해관계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양립할 수 없다!’라는 민권운동의 구호는, ‘우리 소수자도 지배계급의 일원이 될 수 있다!’라는 구호로 대체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체성 정치가 제도적, 법적인 개혁에 안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체제 내로 순치된 ‘정체성 담론’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를 전면화하는 과정에서 활용되기도 하였다. 『역사유물론』지에 따르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신생 독립국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이 나라들을 미국 주도 세계 시장에 통합하기 위해 새로운 문화적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와 상응하는 ‘다문화주의’였다고 한다. 미국은 다문화주의를 1970·80년대의 핵심 이념, 국가 정책으로 내세웠는데, 그런 과정에서 정체성 정치가 제도적 영역으로 적극 수용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오늘 날 정체성 정치는, 자유주의 세력부터 보수 세력까지 모든 제도권 정치인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온건한 정치가 되었다.


정체성 정치, 계급 문제를 생략·은폐하다


이뿐만 아니라 정체성 정치는 계급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으며, 계급 문제를 축소해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체성 정치는 ‘정체성에 근거한 억압이 가장 본질적인 억압’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문제, 계급 문제는 등한시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페미니스트들, 자유주의자들 또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비판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인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 몇 년간 『분배냐, 인정이냐』, 『전진하는 페미니즘』 등의 저작을 통해 정체성 정치의 문제를 지적했다. 정체성 정치를 뜻하는 사회적 ‘인정’을 향한 투쟁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문화 정치’로 귀결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공정한 ‘분배’를 향한 투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 또한 지난 대선 직후 이와 비슷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뉴욕 타임즈』에 “정체성 자유주의의 종말”이라는 글을 기고한 민주당 성향의 학자 마크 릴라는, 정체성 담론이 미국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다양성의 문제가 정치 담론을 모두 포괄한다’고 여기게 만든 한편, ‘계급·전쟁·공공선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정체성 담론을 적극 활용해온 페미니즘,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이와 같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정체성 정치가 피할 수 없는 한계가 다다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체성 정치는 계급 문제에 대해 왜곡된 분석을 내놓는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정체성 정치는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찾기 보다는 ‘인종적, 젠더적 위계’로 인한 ‘불공정한 분배 시스템’에서 찾기 때문이다.


물론 유색인·여성·성소수자가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OECD가 발표한 자료(2016년 기준)에 따르면, 미국 내 성별임금격차는 18.1%로 OECD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세인트루이즈 연방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흑인 대졸자 가정의 중간소득은 (2013년 기준) 5만 2,147달러로 백인과 4만 달러 이상 차이가 나며, 지난 20년간 7,000달러가량 하락했다고 한다. 성소수자가 고용에서 겪는 차별 또한 여전하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의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백인 남성들이 특권을 지키기 위해 여러 소수자 집단을 차별했기 때문에’, 즉 일명 ‘백인 특권(white privilege)’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원래 ‘백인 특권’ 개념은 자본가들이 백인 노동자들과 유색인 노동자들의 단결을 막기 위해 백인 노동자들에게만 일종의 미끼로서 특권을 주었다는 의미로, 백인 노동자도 마찬가지로 착취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정체성 담론 하에서 ‘백인 특권’은 백인과 여타 소수자 집단의 이해관계가 양립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 백인은 투쟁을 위해 조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특권을 가진 존재로서 적대시된다. 그러면서, 백인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상황도 악화되고 있기에 이들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맞서 투쟁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간과된다. 또한 흑인·여성·성소수자 등 소수자 집단 내에도 계급적 격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사회현상으로 치부된다. ‘백인 특권’의 의미가 이와 같이 변용된 과정은 정체성 정치가 자본주의 하에서의 착취, 계급적 억압의 맥락은 지우고 ‘인종’, ‘젠더’ 등의 문제만을 남겨놓았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인종, 젠더의 경계에 따라 전선을 긋는 정체성 정치가 ‘일상적인 차별의 문제’를 주로 지적하는 문화 정치로 귀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백인, 유색인, 여성, 성소수자 모두가 정체성을 막론하고 겪는 계급적 억압을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상의 영역에서 경험한 차별, 주관적 경험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물론 각 소수자 집단이 일상적으로 받는 억압은 실재하고, 그 자체로 매우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레프트 보이스』에 「맑스주의와 정체성 정치에 대한 몇 마디 말」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알버트 테리는 성소수자가 겪는 혐오범죄,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과 2차가해, 공권력이 유색인들에게 가하는 폭력 등이 모두 유물론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소수자 집단이 겪는 차별은 자본주의가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억압을 활용하는 방식, 즉 사회구조적 문제, 계급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일상적 차별의 경험과 ‘자본주의’, ‘계급’ 문제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음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적 차별의 경험이 가지는 중요성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했다. 계급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는 백인 노동자계급을 투쟁에서 배제할 뿐만 아니라, 여성·흑인·성소수자가 겪는 억압으로부터 구조적 맥락을 지운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글을 마치며


미국에서는 현재 무엇이 정체성 정치의 대안이 되어야하는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다. 정체성 정치가 소수자 운동의 주류로 오래 머물러온 만큼,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아주 치열한 논쟁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미국의 여러 맑스주의자들이 정체성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 자신 있게 ‘사회주의 정치’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맑스주의자들은 흔한 오해와 달리 ‘경제가 가장 중요해서’, ‘계급이 유일한 억압의 근거이기 때문에’, 혹은 ‘각종 소수자가 겪는 억압이 일정부분 해소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정체성 정치의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정체성 정치에 관련된 논쟁에 가장 활발하게 나서고 있는 맑스주의자 중 한 명인 아사드 하이더는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찰관이 흑인에게 총을 쐈을 때 그 경찰관이 “흑인이니까 총을 쏴야겠다”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우리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니까 총을 쏴야겠다”라고 생각했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중요한 것은 등 뒤에 박힌 총알이며 그 흑인을 그 자리에 서게 한 역사적, 사회구조적 맥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사건이 단순히 인간본성이나 심리와 같은 추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소수자가 겪는 일상적 억압을 ‘일상’, ‘문화’의 영역에 박제하지 않고, 객관적인 억압의 근거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물론적인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99퍼센트를 지배하는 1퍼센트의 지배계급 속에 다양한 정체성을 배치하는 것보다는, 여성·흑인·성소수자·장애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듦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자체에 균열을 내는 것이 다양한 소수자의 해방을 위한 더욱 ‘현실적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점점 좌파들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정체성 정치에 지친 많은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올 것으로 보인다.



http://socialist.kr/why-identity-politics-is-criticized-in-the-us/


https://brunch.co.kr/@jinboneomeo/6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9199#0DKU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8609#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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