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식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민네이션 Nov 08. 2020

문화정체성과 세계화 7_소수자,혐오, 차별금지

행정대학원 공공정책 전공

0. 들어가기


지난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다루었다. 정체성 정치가 영향을 미쳤던 사례들을 통해서 이념과 정치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를 알 수 있었다. 파이테운동과 마클릴라의 논의를 통해서 진보는 '정체성 정치'의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일단은 지난시간에 배웠던 것들을 돌아보고, 오늘은 이번학기 가장 중요한 주제인 '혐오'문제로 넘어가 보자. 


https://brunch.co.kr/@minnation/2208





5. Joan Scott, Parité : Sexual Equality and the Crisis of French Universalism (2005) <성적차이, 민주주의에 도전하다> 인간사랑, 2009


프랑스의 보편주의의 문제를 다룬 것은 명백한 의도가 있다. 파리테 운동이 프랑스혁명에서 외친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현대 인류의 보편적인 인간을 정치적으로 세우지만,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룬다.

선거입후보자에 있어서도 '인간'은 성별이 없다. 헌법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이미 그 모든 사람에는 '백인' 남자였던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남성으로 한정되어 왔던 '국민'의 범주를 바꾸기 위한 파리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82, 선거입후보자 중 동성비율 75% 이상 금지법안 => 위헌판결

     =>  2000, 프랑스 헌법 3-5 => ‘의원/선거공직에 여성/남성 동수화를 법률화’

     => ‘남녀동수법’ 성립 => 선거인명부 남녀동수 위반시 처벌

     => 헌법에서 말하는 보편인권(인간의 평등) 위배

     => 시민은 단일한 개인이므로 어떠한 범주적 분할도 할 수 없다

     => 페미니즘의 딜레마 : 성차의 무화를 목표,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몫을 요구? : 남녀동수법이 성립하면서 '성차'가 무화되었다면 논리적으로 여성으로서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자유, 평등, 형제애(fraternity) => 자유, 평등, 남녀동수(parité)

파리테는 어원으로 보면 구분자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분할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프라터너티는 형제들이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 시민-보편인간의 이원성(duality) =>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됨 : 그런데 이미 분할되어 버리는 순간 복수의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하나의 분할만 있는 것이 아닐라, 다양하게 분할된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추상해서 보편화된 인간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라는 제도와 조직이 성립하기 힘들어진다. the public이라는 것은 균질적이고 동질한 '국민'을 상정해야만 가능한 개념인데, 파리테의 개념에서는 그러한 통합적이고 추상적인 하나의 모델이 나올 수 가 없는 것이다.

     => 자연적 구분과 추상/보편 = 시민/인간, 법/자연…. 사이

     => ‘인간’(추상, 무색무취)과 개개인(구체, 성/인종/종교…) 사이

     => 대의/대표(representation) : 대표하는 자/대표되는 자 사이의 간극

     => ‘인간’의 재정의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원래 ‘둘’인 인간…그렇다면 “몇”?


https://redream.tistory.com/161


6. Mark Lilla,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필로소픽, 2018)


‘인간’이란 관념을 효력정지시키기 = 비우기

     => 위계적 논리질서 : 하나의 범주 아래 여러 ‘정체성 identity’를 포함

     => 위계적 논리질서를 교란시키기 : 범주 자체의 성립 불가능성에 주목

     => 인간이 본래적으로 남/녀로 구분되어 있다면 단일한 인간은 불가능

     => 마찬가지로 인간이 본래적으로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된다면?

     => 보편적 인간의 형상을 누더기로 만들어 법규범을 패치워크화하기

     => 규범/예외의 틀이 아니라, 규범에 예외를 대질시킴으로써 질서 자체를 교란


Mark Lilla,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The once and future liberal)>(필로소픽, 2018)

     => ‘정체성 자유주의의 종말 The End of Identity Liberalism’ (NYT, 2016.11.20)

     => https://grayecon.com/365 (미국 대선 직후의 칼럼)

     =>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다양성 수사(diversity rhetoric) 비판

     => 미국시민/보편인간의 전통적 규범을 옹호

이책은 힐러리와 트럼프 미국 대선 직후의 쓴 기사에 살을 붙여서 책으로 낸 것이다.

힐러리는 '정체성 정치'를 반대하기 위해서 성소수자들을 불러 냈지만, 불려지지 않은 소수자들에게는 반감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주목받지도 못한 백인 남성들은 오히려 정체성 정치에 매몰되어서 트럼프에게 돌아갔다.

마크릴라는 선거전략 차원에서 정체성 정치라는 프레임에 갖힌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더 큰 범주의 인간을 상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두 가지 사고방식 사이의 대립에서 어떤 함의를 끌어낼 것인가? (중간고사 문제)



https://brunch.co.kr/@minnation/2190


https://brunch.co.kr/@minnation/2203





1. 소수자란 누구, 무엇인가?

자유민주주의에서 다수의 지배와 소수의 의견 보호 그리고 소수의견은 존중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다수 혹은 소수란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정치과정에서의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한 구분인가?

보편주체와 소수 정체성 사이의 구분이 아닌가?

사실 소수자란 '보편주체'의 범주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보편적이지 않지만 국민이라는 범주에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주체와 소수 정체성 사이의 구분에 집중해야 한다.

두 구분의 혼재는 법/정치적 주체화로 대표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을 양산한다.

대표된 주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다수결의 원칙이 보편주체의 지배와 혼동되는 것이다.

정치과정에서의 다수와 소수는 정당이나 투표로 결정된다.

소수자 보호란 다수결에서 패배한 소수자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다.

소수자 보호란 정치과정에서의 대표 혹은 대의되지 못하는 정체성의 보호를 추구하는 것이다.

소수자를 대표한다라는 것은 소수자와 보편주체의 화해인가? 아니다. 보편주체 속으로 유입되라고 하는 것이 더욱 큰 폭력이 되는 것이다.

누스바움과 버틀러의 쟁점은 인권이냐 수행성이냐의 문제이다.

소수자 보호의 제도화 혹은 법제화등의 난점은 헌법권리의 침해 혹은 제한이다.


소수자 보호는 다수결에서 소수에 포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가 아니다. 정치과정에서 대표되지 못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역사적, 구조적 차별

보편주체와 다수결의 연결고리를 통해서 살펴보면 결국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정치적 싸움의 패배자가 아니라 '보편'이라는 기준 안에서 차별받는 비보편적 주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근대국가의 형성에서 보는 것처럼 '보편'이라는 것이 역사적 차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 소수의 대표 가능성

한국에서의 퀴어, 무슬림, 해외동포, 청년, 정당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다수결의 원칙과 보편성을 전제로 한 대의 정치와 불화하는 정체성 정치는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정치과정에서 소수자들의 정치화가 불가능한이유는 무엇인가? 아물래도 정치과정에서의 다양한 요구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표'라는 representation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소주자정체성의 정치적 난점은 representation의 두 가지 층위를 연계시켜야 한다는 것과 헌법상이 보편적 권리와 상충하는 개별적인 정체성 고유의 권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가 이유가 된다. 


representation의 두 가지 층위

1. representation as Vertreten : 대표, 대의, 개별성을 일반화함, 보통 모임의 대표나 국회의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통상적인 뜻 / 통상정 정치과정 속에서 정체성 정치를 사고하고 실천함. 
2. representationa as Darstellung : 묘사, 서술, 표상과 같이 실제를 반영하여 재현re-present하는 것을 말하며 고유한 정체성 자체를 세상에 알리고 보여주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3.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은 2006년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로 시작되었다. 

헌법 11조에는 '성별과 종교, 사회적 신분'만을 차별 금지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성별, 종교, 신분 정도가 헌법상 보편주체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였다.  

2007년에는 법무부가 발의했고, 이데 따라서 성적 지향, 병력, 언어 등의 차별금지 사유를 배제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기독교와 재계는 반발을 한다. 

기독교계의 반발로 처벌 규정이 삭제되면서 실효성은 상실되었다. 

2017년에 20대 국회에서는 다시 논의 하기로 했다. 



4. 소수자 정체성 정치와 헌법 권리의 충돌

혐오발언 제제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고민해보자. 

선거국면에서 돌출하는 혐오발언은 '동성애자, 무슬림, 난민'등에 대해서 매우 공격적이다. 

독일의 사례는 어떤가? 나치즘과 그에 대한 반성은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규제를 해야할까? 아니면 자유롭게 정체성의 범위를 보편영역으로 확장해야할까? 

헌법상의 보편적 권리주체란 '혐오'를 통해서만 성립 가능한 것인가? 

동질성에 대한 강박이 보편주체를 오히려 협소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규제를 통해서 오힐려 자유가 보장될 가능성도 많다. 

역사부정(historicall denial, 광주민주화혁명 부인)과 혐오가 반-자유를 조장한다. 

어떤 발언이나 행위가 다양성을 해칠 때 자유가 훼손된다는 관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4387.html


혐오표현

법적으로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하는가? 

규제한다면 어느정도까지 규제해야 하는가? 

인식교육의 차원을 어느정도까지 진행해야 하는가?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법적인 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누스바움은 혐오의 감정은 법체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5. Martha Nussbaum, From Disgust to Humanity 혐오에서 인류애로


혐오란 특정한 사람, 집단을 일정한 성향이나 표지르 ㄹ이유로 그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다'라고 누스바움은 정의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법학자인 패트릭 데블린은 "어떤 행위가 합의하지 않은 제 3자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떤 행동을 불법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라고 말한다. 

부시대통령의 측근인 레온 카스는 "혐오란 우리의 본능 속에뿌리를 내린 정치로서 우리는 그 덕분에 파괴적이고 끔찍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제어된다."라고 말한다. 

혐오감정이 '정치체the body politic=국가'를 수호하리라는 믿음을 준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혐오'의 기능적인 장치라고 보는 관점이다. 한국사회에서도 '빨갱이' 담론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공동체를 지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 근간인 '법-권리'보다 더 원칙적인 공동체의 정상성이 혐오감정으로 지탱된다는 믿음을 가진다는 부분에서 누스바움은 데블린이나 카스의 논의에 대해서 반대할 수 밖에 없다. 


독일 극우당, 독일인 혐오에 대한 처벌 요구

보통 혐오나 차별에 대한 논의들이 반대급부로써 자신들도 차별받았다고 말하면서 역차별의 논리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혐오발언의 기원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것은 다수와 소수라는 것으로 단순한 숫자로 파악하는 방식의 '보편성' 논의이다. 혐오와 관련해서, 차별과 관련해서 가장 큰문제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역차별을 논의하는 것이다. 

문제는 구조와 역사 안에서 문화적으로 축적된 '소외되고 차별받는 소수자'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수결의 논리에서 숫적으로 열세인 사람들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 극우당은 '혐오'라는 관점에서 독일인을 혐오하는 것을 보호하자는 법개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구조적 차별을 더욱 합리적으로,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http://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AKR20180429064900082


대안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존중과 공감의 원칙이 필요하다. 

존중 : 종교와 같이 타인의 삶에 대한 탐색을 존중하기

공감 : 타인의 눈에 비친 세상을 상상하기



표현의 자유

다수자와 소수자라는 구분은 2가지로 보아야 한다. 원래는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서 소수가 된 사람들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혐오'와 '배제'의 문제는 당연히 역사적,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존재자체만으로 배제와 차별을 받아온 집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국가가 처음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배제된 특정 소수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난민으로 만들었던 사례를 기억한다. 

혐오발언도 표현의 자유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헌법상에서 자유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인간에 대한 기본 가정'에 의해서 정의되는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권과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언제나 차이가 업는 '균질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려면 '균질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느낌과 이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헌법과 표현의 자유는 두번째 소수자에게 분리하거나 무력하게 작용하게 된다. 

다시 돌아오면 '배제와 혐오'를 정당한 표현의 자유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규제가 필요하고 오히려 규제를 통해서 자유가 더욱 증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혐오의 발언을 규제하는 것이 과연 자유를 침해하는 것인가? 물론, 지금까지는 '규제' 자체가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https://puripari.tistory.com/entry/%EC%84%B1%EC%A0%81-%EC%A7%80%ED%96%A5%EA%B3%BC-%ED%97%8C%EB%B2%95-%ED%98%90%EC%98%A4%EC%97%90%EC%84%9C-%EC%9D%B8%EB%A5%98%EC%95%A0%EB%A1%9C




버틀러의 수행성 이론, 버틀러(J. Butler)의 ‘수행성 정치’이론의 정치학적 공헌과 한계_서유경


버틀러의 젠더이론의 출발점인 젠더의 고충 (1990; 1999) 은 일차적으로 젠더는 어 떤 사람의 몸과 정신적인 정체감에 사회적으로 부과된 “내부화된 일련의 기호들, 즉 내부 화된 이미지 세트”이므로 젠더화된 주체가 어떤 고정된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 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한 다음, “성성이 범주화를 통해 쉽사리 요약되거나 통합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 주장에 반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녀가 보기에 성성을 여성 성/남성성으로 양분하는 기존의 젠더이론들은 현실적 삶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성성 의 표현 형태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다채로운 성성의 유형 가운데 단지 두 가지에 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젠더를 대체하는 ‘퀴어’ 라는 대안 적 개념을 도입하는 한편, 자신의 젠더이론은 “새로운 젠더 정치학”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버틀러의 퀴어 이론은 성적 소수자들의 주변화된 사회적 지위와 사회 내에서 일반화된 공중의 폄하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 기초하여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오는 폐해를 없애거나 줄이기 위한 처방책으로 제시된 젠더이론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젠더이론 이상으로 독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녀의 퀴어이론과 그것의 후속이론인 수 행성 정치 이론은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치이론으로 확대해 석할 수 있는 잠재력을 담보하고 있으므로 ‘인정의 정치’ 혹은 ‘차이의 정치’ 패러다임의 한 유형으로 분류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최근 버틀러 자신도 이러한 독해방식을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자극적인 발화: 수행성의 정치 (1997) 에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점차 젠더 차원에서 수 행성 정치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면서 그녀가 하나의 보편타당한 인간행동학적 행위수행이 론과 윤리학의 구축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사실이 그 점을 우리에게 확인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버틀러는 우리의 언어행위를 “분명한 기원이나 종결점이 없으며 갱신할 수 있 는 행위”(GT, 40)로 이해하고, 이러한 행위가 담보하는 수행성이 갖는 정치적 효과 및 잠재성에 주목하여 수행성의 정치이론을 기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버틀러의 수행성 정치가 표면상 강력한 정치적 실천성을 담보하는 이론으 로 보일지라도 그녀가 수행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범주에 과도하게 실천적 희망을 부여하 고 있는 사실은 정치이론적 약점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 문화적 구성주의(Cultural Constructivism)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는 우리의 “몸을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방식”(UG, 9)이다. 우리의 몸은 공간 속에 하나의 지점을 점유하는 물질인 동시에 시간․공간․문화적 조건들의 지배 를 직접적으로 받는 실제 대상이다. “젠더와 성성(sexuality)을 타인들에게 노출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몸이다”(UG, 20). 우리의 몸은 늙어가고, 형체도 변형되며, “시각적, 담론 적, 감촉적 인간관계망” 속의 상호작용에 따라 그것이 의미화하는 방식도 달라진다(UG, 217). 

예컨대 여성의 몸은 남존여비의 관행이 팽배하던 시대에는 사회적 열등감과 인격 적 비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최근 페미니즘 담론의 맥락에서는 모성이라는 사회적 의 미체계를 표상하는, 크리스테바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성(聖)스러운” 몸으로 그 지위가 격상되기도 하는 것이다(Kristeva & Clément, 2001).



2. 비주권적(non-sovereign) 언어행위와 언어주체 

버틀러에 따르면 “발화(speech)는 늘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다”(ES, 15). 마치 우리의 몸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성을 담지하는 실체로서 항상 다 르게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더불어 생존”(UG, 217)하듯이 항상 “특정한 시간적 지평의 연계성 속에서”(ES, 14) 수행되는 우리의 언어행위도 그 지평의 연계성에 변동이 생기면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기가 어렵다. 그 결과 특정 언어행위가 지니는 혹 은 창출하는 힘은 성격상 맥락적이고 한시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행위가 ‘맥락적’인 성격이라 함은 그것이 특정 발화시점의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시간성 속에서 발생하며 이전 시점에 작동했던 사회적 의미체계와의 연계선상 에서 같거나 다른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일례로 “혐오발언(hate speech)”은 이전의 유사한 행위들을 불러들임으로써 혹은 전거함으로써 행위수행의 효과를 창출한다(ES, 20). 그러나 어떤 미래 시점에 그것이 이전의 것과 유사하게 반복되는 형식으로 수행되 었다손 쳐도 그 효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언어행위는 맥락 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동시에 ‘한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3. 언어의 행위대리(agency)와 수행성(performativity)

 언어는 “대개 행위대리(agency)6)로 여겨진다—[그것은] 결과를 수반하는 하나의 행위(an act)”로, 행위수행이 연장된 것(an extended doing)으로서 효과를 내는 공연행위로 간주된 다. 이 정의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다. 언어는 어쨌거나 “행위대리”로 “간주된다,” 즉 [행 위대리로서] 가정되거나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대리로서의 그것은 사유(思惟)다; [언어형태로서의] 형상적 대체가 언어의 행위대리적 의견[표출]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 러한 공식이 언어 속에 주어져 있으므로 언어의 “행위대리”는 공식의 핵심일 뿐 아니라 바 로 그것의 행동방식이다(ES, 7, 강조는 본문).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버틀러에게 있어 언어는 우리의 “행위대리로 간주되고 가정되거 나 구성되는” 것이며, 우리의 의견표출을 가능하게 하는 “형상적 대체” 양식이다. 한마디 로 “언어는 행위대리다”(ES, 7). 또한 행위대리로서 언어는 “사유”다. 그러나 언어가 행위 대리라면 그것은 분명히 대리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그것 을 사용하는 주체를 지목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어가 발화주 체를 대리한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버틀러가 “언어의 행위대리는 주체의 행위대리와 동일한 것인가?(1997, 7)라고 되묻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버틀러에 따르면 언어는 “내가 자아를 투사하고 그 자아의 반영결 과를 수집할 목적에서 사용하는, 외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매개수단이나 도구가 아니 다”(UG, 183. 강조는 본문). 위 인용문에서 보았듯이 언어의 “행위대리”는 언어 속에 주 어진 공식, 즉 “의견을 제시하는” 기능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언어의 도구성은 종종 다른 요소들이 개입함으로써 일부 또는 전부가 무력화되거나 상실될 수 있다. 우선 상대가 침 묵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다음으로는 화자(話者)가 의도했던 말 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역으로 의도하지 않은 또는 원치 않는 효과가 나 타나는 경우도 있다(Austin 1975, 106; 김영진 1992, 136). 예컨대 의도에 대한 오해, 곡해, 와전 등이 그러한 경우다. 이러한 경우에 언어의 행위대리와 주체의 행위대리는 동 일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두 번째 이유는, 말의 효과와 관련하여 화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창출되는 경 우에 언어는 주체를 대변하기보다 언어 자체의 공식에 따른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 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언어가 일단 화자의 입을 통해 발화되면 그것은 하나의 ‘메시 지 혹은 기호’로서 기존의 언어적 연계망 속에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면서 그것에게 특수한 ‘언어적 주기’를 돌게 된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언어적 존재’라는 언명을 내놓은 이후 그것은 다른 시대와 장소, 사상가에 따라 실로 다 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혹자가 그것을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구별하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는 한편, 버틀러 같은 언어 수행성 이론가는 그것을 현대의 기호학과 참 여민주주의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현상으로 독해해내고 있는 게 좋은 예다. 

끝으로, 버틀러는 언어의 수행적 차원에서 언어행위는 “분명한 기원이나 목적을 갖지 않는 반복가능한 행위”(ES, 40)라고 정의한다. 혹자가 이렇게 이해했을 때 ‘주체’는 원칙 상 행위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은 쉽게 수용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기원”을 알 수 없는 행위란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또는 행위 주체가 없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목적을 갖지 않 는” 행위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보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러한 행위의 필요성은 무엇인지, 가령 그러한 행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등등 에 대해 우리가 쉽게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_고현범


현대 도덕 철학에서 동감 연민 분개와 같은 도덕 감정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강한 반감인 혐오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 편이다 누스바움은 로진의 사회심리학적 연구와 밀러의 사회구성주의적 . 연구를 바탕으로 혐오에 대한 강한 회의론을 개진한다 누스바움의 혐오 . 에 관한 논의는 그녀의 지속적인 감정 연구의 연장선에 놓여 있지만 다, 른 한편 사회적 쟁점을 배경으로 한다 누스바움은 혐오 연구에서 다른 . 감정 연구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판결에 대한 법철학적 검토를 시도하는 데 이 글에서는 그러한 접근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감정 철학과 , 도덕 철학적 관점에서 누스바움 논의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했다. 

감정을 평가적 믿음으로 정의하는 인지주의 입장에서 누스바움은 도덕 감정의 적절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적절한 도덕 판단이 가능 . 한 감정들의 목록에서 혐오를 제외시킨다 즉 혐오는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유한성을 부정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정상에 대한 불안한 집착에 서 비롯하기 때문에 존엄성을 존중하는 도덕의 가치를 위협한다는 것이 , 다 그렇다면 혐오는 인간성에 대해 위협적인 감정인가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에 대한 감정 철학적 관점과 도덕 철학적 관점에서 의 반론을 검토했으며 이러한 반론들보다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도덕적 혐오 판단은 정당화하기 어 , 려운 인지적 내 용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 모든 감정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 다 우선 감정과 도덕 판단의 관계에 대한 누스바움의 인지주의 감정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장 도덕적 혐오에 대한 누스바움의 회의적 시각은 (2 ). 혐오의 감정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누스바움은 로진 의 사회심 . (P. Rozin) 리학 연구를 바탕으로 혐오의 핵심적 정의를 논의한다 장 이 논의를 (3 ). 살펴본 다음에 혐오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위협인가 , 란 물음을 통해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의 타당성을 검토하려고 한다(4 장).

감정에 대한 누스바움의 철학적 입장은 인지주의다. 인지주의에 따르 면 감정은 평가적 판단이다 다시 . 말하면 인지주의적으로 이해된 감정은 단순히 어떤 생리적 수준의 동요를 반영하는 감각이나 느낌들과는 구별 된다. 누스바움의 인지주의는 스토아학파의 감정에 대한 기본 견해를 수 용한다 즉 스토아학파에서 감정은 기본적으로 믿음이자 판단이다. 

누스 바움은 이러한 견해를 감정을 단지 신체적 떨림으로 간주하는 비인 지주의 입장과 대비시킨다 이른바 “표준적인(standard)”인지주의를 대 표하는 누스바움의 감정론에서 감정은 다음의 특성을 갖는다. 

첫째, 감정은 어떤 것에 관한 감정이다 감정은 대상을 갖으며 이때 감정 대상은 주체와는 분리할 수 없는 지향성을 갖는다 즉 감정 주체가 지각하는 그 대상은 주체에 의해 해석된 대상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은 단지 심장 박동이 증가하고 머리가 쭈뼛 서는 신체적 반응이 아니라, 나에게 해를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대상을 향해 있는 것이다. 

둘째 감정은 대상에 관한 믿음을 체현한다 즉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두려 움에 몸을 떤다면 이때의 떨림은 그 대상이 위험하다는 믿음인 두려움에서 비롯한다.  

셋째 감정을 특징짓는 지향적 지각들과 믿음들은 어떤 가 치와 관련된다 즉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가치 부여된 것으 로 본다 즉 두 . 려움은 나 자신이나 또는 내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중대한 피해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이러한 , 피해를 내가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인지주의 입장에 따라 누스바움은 혐오 감정의 인지적 내용을 분석한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검토하겠지만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그 도덕적 함축에서 정당화하기 어려운 인지적 내용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공적 판단의 기초로 삼기에 문제가 있는 감정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게 모든 감정이 “규범적 의미에서 비합리적이며 따라서 공적인 , 숙고 과정의 지침이 되기에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이에 누스바움은 감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들을 검토한다.

누스바움은 혐오 감정이 갖는 인지적 구성 요소를 논의하고 이 감정에 대해 회의론적 주장을 제기하는 데에 사회심리학자 로진의 연구를 기초 로 삼는다 로진이 제시하는 혐오의 핵심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다 “혐오는 역겨운 대상의 입을 통한 체내화 가능성에 대한 불쾌 감이다 역겨움의 대상은 오염물이다 즉 오염물이 우리가 먹으려 하는 음식물에 살짝이라도 닿게 된다면 그 음식은 먹을 수 없게 된 다.”

로진에 따르면 음식물이 혐오를 정의하는 데 , 핵심적인 대상인 이유는 인간이 잡식성 동물이란 데에서 유래한다. 많은 동물들은 나면서부터 무엇을 먹을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잡식성 동물들은 . 무엇을 먹고 또한 먹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잡식성 동물은 한 . 종류의 먹이에만 의존하지 않는 유동성의 장점을 갖지만 반면에 해로운 독성을 섭취하거나 영양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섭생의 위험에 노출되 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음식물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부단 히 새로운 음식 맛을 보려고 하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음식물 특히 동물성 음식들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로진의 연구에서 누스바움은 특히 동물과 그 부산물에 주목한다.21) 혐 오의 중심은 동물 또는 동물의 배설물에 있고 혐오는 그것들과 접 , 촉한 대상으로 전이될 수도 있다 혐오는 동물의 배설물뿐만 아니라 시체로도유발되는데 이는 부패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로진은 동물과 관련된 대상 들이 혐오를 유발하는 핵심적인 대상으로 작용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 아닌 동물 또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지닌 동물성 간의 경계를 정돈하려 는 관심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동물성이 혐오스러운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취약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 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이다.” 

오염물이 혐오 감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까닭은 먹거나 접촉할 경우 주체를 오염시킬 것 이라 여겨지는 즉 이 대상들이 바로 인간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유한성 과 동물적 취약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혐오는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식들을 갖는다 그러나 . 모든 사회에서 “표준적인 혐오감은 배설물, 혈액 정액 소변 코의 분비물 생리혈 시 체 부패한 고기 진액이 흘러나오거나 끈적거리거나 냄새가 나는 곤충 등 원초적 대상을 향한다.” 이러한 원초적 대상에 대한 혐오는 진화 적 기원을 갖는 듯하며, 세상을 체험할 때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신체에 위해한 물질들의 목록을 일일이 작성해서 전달하고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댑티브 리더십_핵심내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