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의 의의와 역설적 결과에 대하여 국민을 정치적 주체로 삼은 근대의 흐름과 연관시켜 설명하시오. 또 이 프레임을 전제로 하여 현재 한국에서의 사례(페민니즘, 난민, 퀴어 이슈 등)에 관해 자기 생각을 논하시오.
0. 들어가기_인셉션과 테넷 사이
1. 보편 논쟁과 근대성 논쟁_문화정체성과 세계화
2. 주권을 인권에 덮어쓰기_정체성 정치란 무엇인가?
3. 주권의 히스테리와 인권의 미스테리_정체성 정치의 의미와 결과
4. 비대칭성과 비식별역의 패러독스_퀴어 이슈와 기독교
0. 나오기_같음에서 다름이 아닌, 다름에서 같음을
주요한 흐름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인셉션에서는 '기원'을 찾아가는 노력에서 알아보고, 테넷에서는 시간의 개념으로 알아본다. '정체성'이 논의되는 공간은 먼저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보편과 특수 논쟁이 일어남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서 전체적으로 큰 흐름에서 '근대성'이 가지고 온 '시간'의 보편화로 인해서 주권과 인권의 패러독스가 발생했음을 알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간'개념을 다시 정의해야 함을 제시한다.
보편논쟁에서 '보편'은 특수성의 합이 아니라 특수성이 없더라도 존재할 수 있는 '영원주의'적 시각에서의 보편성이다. 문제는 일러한 보편성의 담론이 '근대성'이 가진 '현재주의'적 시간개념과 만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권력'을 가진 이들의 놀음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현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는 시간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된다. 이것을 장을 '문화'라고 보고 그 문화 안에서 동일하게 '우리'라는 테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을 정체성으로 보았다.
정체성을 논의할 때는 인셉션에서 제시한 '정신분석학적 자아'개념과 테넷에서 제시한 '시간'개념으로 정리한다.
문화정체성은 '우리'를 정의하기 위한 시간과공간의 함수이고, 세계화는 이것을 공유하는 가운데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집단은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승리한 집단은 보수에 편입되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주권을 인권에 덮어쓰기하는 '정체성 정치'의 핵심이다.
주권은 근대성이 발명한 국가의 강력한 무기였으며, 국가의 성격에 따라서 주권의 양태와 방법과 사용시기는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히스테리 때문에 국가마다 혐오와 차별, 정체성정치의 양태가 달라진다.
이에 대응해서 인권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데, 근대성에 도전하는 현대성은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해체되고 다시 결합되어서 각자 다양한 미스테리를 만들어낸다.
현재의 난민, 페미니즘, 성소수자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주권과 인권의 대립, 히스테리와 미스테리의 대립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바디우에게서 독창적인 초월의 공간과 사건을 통해서 진리주체가 탄생한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레비나스를 통해서 비식별역을 함께 발견해 가는 '같음에서 다름을'의 논리로 미스테리가 안개와 같이 연막탄적인 초기전략이라면 이제는 제대로 인권을 담론화시켜서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을 이야기해야 함을제시하고 마친다.
이번 중간고사때는 아래의 목차보차에서 시간개념은 다루지 못했다. 테넷과 인셉션을 정주행한 뒤에 다시 써 봐야겠다
0. 들어가기_인셉션과 테넷 사이
1. 보편 논쟁과 근대성 논쟁_문화정체성과 세계화
2. 주권을 인권에 덮어쓰기_정체성 정치란 무엇인가?
3. 주권의 히스테리와 인권의 미스테리_정체성 정치의 의미와 결과
4. 비대칭성과 비식별역의 패러독스_퀴어 이슈와 기독교
0. 나오기_같음에서 다름이 아닌, 다름에서 같음을
정체성 정치의 의의와 역설적 결과에 대하여 국민을 정치적 주체로 삼은 근대의 흐름과 연관시켜 설명하시오. 또 이 프레임을 전제로 하여 현재 한국에서의 사례(페민니즘, 난민, 퀴어 이슈 등)에 관해 자기 생각을 논하시오.
0. 들어가기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언제부터 한국인이었을까? 어떤 조건이 있으면 한국인인가? 보통은 '부모님이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적인 것인가? 국민국가가 탄생하면서 만들어진 발명품은 아닌가? '국민이 아니면 이니간이 아니다'라는 루소의 논의를 발전시키서 정체성 정치의 영역까지 나아가보면 사실은, 근대의 보편성은 '국민국가'로 정체성의 바운더리를 만들고, 그 바운더리 안에서 '국민'의 범주에 속한 사람만이 인간으로 인정받는다는 '정체성정치'가 실행된다. 그러니깐 1980년대 이후에 진행되는 정체성 정치는 오히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근대의 기획에 대한 속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성 논쟁에서와 같이 '정체성을 규정짓는 국가'의 보편성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성을 가진 배제된, 차별된 이들의 다시금 근대성의 논리인 '정체성 정치'로 미러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아니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일까? 조심스럽게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성을 보편성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던 일본의 '근대초극'논리와 같이 '새로운, 개혁적인, 새시대'와 같은 논리들이 탈주선을 내건다는 것이 그만 '제국주의 논리'로 귀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체성 정치의 기원과 이것들의 역효과에 대해서 진단하는 것과 우리 사회의 '혐오와 배제'의 뿌리를 찾아보는 근대의 기획에 대한 계보학적인 도전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서, 근대가 만들어 놓은 보편성의 '정체성 정치'와 그에 대한 반대 담론으로서 '소수자들의 정체성 정치'가 최근들어서 어떤 형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근대성의 대안 담론의 성격에서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페미니즘이나 퀴어문화'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인간-국민을 규정하는 법-정치구조
인간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관계구조는 '인간이 되어야 국민이 되고, 국민이 되어야 성을 인정받고, 정치적인 권리를 얻으며, 종교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인종적으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형성된다. 집합적인 혹은 논리관계는 말끔하게 구조화가 가능하지만 과연 맞으까?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것이 뒤집어진 집합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원래 근대의 '민족국가'라는 기획은 동일한 권리와 평등이 모두를 '법-권리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로 균질적인 정체성으로 소급해 버렸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균질적인 정체성을 넘어서는 개인에 대해서는 체제의 바깥, 국가의 바깥, 정치의 바깥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국민일 수 있고 국민일 수 있다면 성과 정치, 종교와 인종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국민이되어야 한다는 '법-정치'구조의 최소공약수는 종교와 정치와 같은 다양성의 최대공배수보다 우위에 있었다.
원래 자연적인 집합은 이와 같다. 그러나 국민국가는 이것이 뒤집어 진다.
애초에 이러한 상황을 예상한 루소는 Sleeping sovereign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국민국가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국민이 되어야만 인간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즉, '국가=법=권리'시스템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상정한 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은 법으로 테두리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서 모든 주권자들은 국가 앞에서 잠든 것과 같은 '효력없는' 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주권은 인권들을 흡수해서 더욱 커져버린 것이다. 결국은 인간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은 국가의 법 안에서 정치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럼 어떤 일들이 발생하게 될까? 당연히 법의 바깥에, 정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인간'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호모사케르(저주받은 인간)으로 탈바꿈 하게 되는 것이다.
법으로 부터 밀려난 인간은, 국민으로부터도 밀려난다.
2. 혐오의 정체성, 법-정치의 구조
범주의 집합적 혼동은 결국 '국민이 되어야 인간이 된다'라는 구조를 양산하고 고착화시킨다. 집합 혹은 논리 관계가 뒤죽박죽되면서 '법-권리'의 논리가 흐트러지는 '역사-정치'의 실제적인 구조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범주와 집합의 역은 To make sovereign sleeping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침묵하도록 구조화'를 이룬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집합의 역에서는 이미 그 민주주의에서의 국민은 인간들 중에서도 시민권을 가진 사람만을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구조화된 차별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정치화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전칭을 사용하면서 특정집단을 표준으로 하는 '법-권리'를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는 것이다. 침묵은 '강제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원래 집합에서 뒤집어진 비틀어진 구조가 된다.
3. 정체성 정치와 그 역효과
정체성 정치는 전통적인 다양한 요소에 기반한 정당정치나 드넓은 보편 정치에 속하지 않고 성별, 젠더, 종교, 장애, 민족, 인종, 성적지향, 문화 등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을 의미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는 1960년대 혹은 70년대 이후로 여러 형태로 사용되어 왔지만,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이 용어는 여성운동, 미국의 민권운동, LGBT운동, 내셔널리즘 운동, 탈식민 운동 등의 출현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인간/국민이라는 균질적 정치주체와 인종/성별/종교/문화/신체특성 등 동질화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 사이의 균열/갈등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혐오사상으로 이어진다. 무엇인가 정체성이 규정되면 그에 따라서 그 정체성의 바깥이 정해지는 것과 같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샤츠 슈나이더의 말처럼 '갈등선'이 그어지고 나면 그에 따라서 좌와 우가 생기고, 적과 동지가 생기는 것과 흡사하다. 정체성 정치의 역설적인 효과는 이와 같이 우리 편을 선언하는 순간 상대편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크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힐러리가 표방한 '정체성 정치'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언급되지 않았던 '백인 하층민'들의 정체성을 옹호한 트럼프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정체성 정치의 역설적 결과는 사실 현재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태동에서부터 신분이나 속인주의적인 방식으로 국민을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어떤 특수한 것을 기점으로 해서 만들어지는 표면적이라고 본다면 인간이 경험하는 지역적, 혈통적 특징과 함께 그 내면에 생각과 언어와 이념의 특징들을 모두 포함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소거하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럼 그 소거한 특징들을 중심으로 또다른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옹호하기 위한 '정체성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 자체만으로는 안된다. 왜냐하면 법치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20세기 이후의 국가시스템에서는 '법'으로 규정된 권력만이 법이 등에 지고 있는 주권을 무기로 삼아서 현실을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체성 정치는 다시 '법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최근들어 '동성애차별 금지법'과 같이 페미니즘이 도전하고 있는 법적인 투쟁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운동에서 그것의 지속가능성과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주권권력을 전제로 하는 '법의 인정'을 위한 인정투쟁이 되는 것이다.
4. 주권의 히스테리와 인권의 미스테리
근대의 발명품인 '주권'과 '인권'은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 주권은 그 자체로 포함관계에 있어서 '히스테리'적인 성격을 갖는다. 주권의 범위에 포함되어 있는 '먹는 입'(인간이기는 하지만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신분과 권위로 인해서 말하는 입으로 인정받지 못한'에 대해서 이들을 어떻게든 포함시키거나 배제하려는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마치 깔끄한 벽지에 조그만 얼룩이 있으면 그것을 지워버리고 싶듯이, 오류나 불결함으로 생각되는 '먹는 입'의 인간들은 주권의 히스테리에 의해서 내쫓아진다. 이것이 호모사케르가 되기도 하고 때론 혁명을 등에 엎고 새로운 권력을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인권의 개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권리'라는 세계화의 선물 속에서 히스테리에 맞선 미스테리한 신분과 권위 포함관계를 가지게 된다. 누구라도 정의내릴 수 없지만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이 하나로 모이기 때문에 그 둘의 연결관계 안에서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 자체' 말이다. 그래서 인권은 미스테리이고 이 미스테리를 규정하고 속박하기 위한 주권의 히스테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동원된다. 전두환 시대의 삼청교육대와 같이 주권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면서 국가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시켰다. 그 중에서 히스테리적인 요구를 응답하고 주권에 대해서 침묵하게 되는 '국민'이 된 사람들만 다시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권의 미스테리를 간직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가슴속에 규정할 수 없는 인간성과 본질적인 동등함을 숨기면서 민주주의가 도래하기까지 기다렸다고 생각한다.
5. 태극기집회와 퀴어축제
매년마다 볼 수 있는 관경.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특징과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와 성소수자들을 몰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태극기를 집어 들고서는 퀴어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권권력'을 동원하여 위협을 가한다.
차별할 수 없으면 혐오한다
차별할 수 없게 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들은 주권의 히스테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혐오를 자행한다. 그에 따라서 퀴어축제에 참석한 사람은 악마도 되었다가, 악인도 되었다고, 부적응자가 되기도하고, 국가에 해를 입히는 반동분자가 되기도 하다가 빨갱이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국민국가가 만들어지는 시기의 근대의 보편성이 만든 '정체성 정치'로써의 '국민'개념은 유독 한국에서 더욱 발전되고 확대되는 양상이다.
이에 대해서 소수자들과 배제되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는 문화적인 대응과 법적인 대응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자신들의 권리와 존재가치를 선언한다.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던 본능과 국가의 의해서 금기된 것들과 인정받지 못하는 것들이 사실은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음을 퀴어축제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동안 국가의 선언이나 사회속의 '미풍양속'으로 제한되었던 자신의 '인권의 미스테리'를 발현하는 계기와 장소로서 퀴어축제를 향유한다. 법-정치적인 방식보다는 오히려 문화-사회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퀴어축제는 나름대로의 보편성 획득을 위한 '세계인들의 축제'로 매년 열리고 있다.
6. 정체성 정치를 넘어
개인적으로는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본다. 무엇인가를 규정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급부로써 다른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또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같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의 실수처럼 성소수자들이나 페미니즘 안에서도 계급차가 일어날 수 있고, 퀴어축제 안에서도 방법론에 있어서 다양한 갈등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근본적으로 어떤 운동이나 방법이 태동하는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장의 무한성은 알랭바디우가 말한 '순수다자'의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을 가득메우고 있고 그 사이에 번개처럼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잠시 진리가 반짝거리고 그것에 반응한 주체는 진리주체로 변신하게 된다. 그에 대해서 '사건'을 만들고 기다리고 움직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무한하게 잠재되어 있는 것들은 '규정적 권력'이나 '욕망'도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개념과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체성 정치는 한시적으로는 맞지만 그 내면의 추동되는 근원자체는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법-정치적인 논리를 획득하려고 무엇을 규정하는 순간 또 다른 배제와 혐오를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파리테 운동처럼 남녀동수의 비율을 산정한다는 것이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의 고유성을 유지한 체로 개인주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페미니즘'이라는 여성들의 연대는 구성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규정은 언제나 바뀔 수 있고, 그 규정은 또다른 배제를 낳는데, 그 규정의 근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가 열어 놓은 무한의 공간에서 오히려 줄리아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정의를 가지고 오는 것은 어떤가 한다. 동성애라는 것과 이성애라는 것도 동질적인 집합은 오히려 '애'라는 '사랑'이라면 크리스테바의 논리에서처럼 말하는 입이나 먹는 입이나 결국은 '태어나야 가능 한 것' 이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가장 동질적인 조건은 '태어난다'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반드시 있었으며 근본적으로는 연약한 아이가 자라나기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시작은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비천시 됨'(아브젝시옹)의 개념이 될 것이고, 이러한 아브젝시옹은 정체성 정치가 말하는 '규정짓기'와는 다른 방식에서 내가 비천하게 됨으로써 상대방이 자기 중심에 설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국민국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민이라는 것을 정의하고 그에 따라서 배제와 차별을 잉태했다면, 오히려 기원으로 돌아가서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 인간이기 이전에 우리는 태어나야 함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 도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체로 설 수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0. 나오기
다른 방식으로 동질성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식별영역과 대칭적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인간'의 우선성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면 오히려 해답은 비식별여역과 비대칭적인 연결관계를 바디우의 무한의 공간에 '순수다자'로 풀어놓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방식은 같은 것에서 다름을 찾아내는 하이데거의 방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름에서 같음을 발견해 내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러면 한나아렌트의 말이 맞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현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가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과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말을 하면 누군가는 듣고 들은 것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공시성'의 우위를 '통시성'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나아렌트의 이야기로 마무리 한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만나서 다양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가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라고 할 때 그 권윈가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서 출처를 삼는다면 분배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럼 우리는 'co-founder'로서 함께 근본을 정초해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이러한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러한 방식 자체가 보편성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문화정체성의 근대성을 폭력으로부터 지금 여기의 '정의'로 한정짓고 보편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시작이 아닐까 한다.
다음글쓰기의 재료들.
1. 마크릴라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제 1장 반정치
프랭클린 딜레노 루스벨트가 당선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실재를 구획하고 일부 대상들에는 명칭을 부여하는 반면,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사실상 그것들이 의식에서 사라지게 했다. 스위치가 젖혀졌다. 혹은 티핑포인트가도래했다거나 게슈탈트 전환이 일어났다고 표현해도 좋다. 아무튼 그 일은 일단 일어나면 되돌릴 수 없다. 한 통치체제 기간의 논쟁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의 유일한 선택지는 새로운 통치 체제를 준비하는 것이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p27
그러므로 민중이 권력을 찬탈한 자들에게 맞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된다는 것은 게으른 생각이다. 바로 이 실수를 공화당은 루스벨트 시대에, 민주당은 레이컨 시대에 범했. 민중의 마음과 정신을 한 선거 주기보다 더 오래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이데올로기가 오래 지속된다면, 이는 그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현실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담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점과 관련해서는 맑스가 옳았다. 주어진 역사적 국면에서 어떤 정치사상이 공명을 일으킬지는 부분적으로 물질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루스벨트 통치 체제 기간이 40년이나 지속한 것에는 구체적인 물질적 이유들이 있었다. 또한 레이건 통치 체제 기간이 40년이나 지속한 것에는 구체적인 물질적 이유들이 있었다. 또한 레이건의 통치체제 기간이 대략 그 만큼 지속한 것에도 구체적인 물질적 이유들이 있었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상 속 레이건주의를 새로운 사상으로대체하는 일에 진지하게 나서려면, 그들은 먼저 레이건주의가 왜 발생했고, 왜 그토록 오래 설득력을 유지 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애당초 미국 경제와 사회의 어떤 변화들이 그 이데올로기를 설득려 있게 만들었을까? p28
2. 제국일본
제국의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을 ‘콘크리트 공사’에 비유한다. 포스트 제국 시기가 도래하자마자 동아시아 각국들이 과거 제국의 기억을 깡그리 지우는 일에 집중했다는 의미다. 이는 식민지배를 한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식민지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전후 일본은 ‘파시즘’ ‘침략전쟁’ ‘식민지배’를 지금의 일본과 분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제국을 담론장에서 지워나갔다. 뼈아픈 식민경험을 한 한국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단일 민족’ 등의 구호를 통해 상처입은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듯 제국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미소냉전과 한국전쟁, 뒤이은 극심한 좌우분열 때문에 제국일본을 성찰할 여유가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엄연히 존재했던 제국일본이라는 지층을 탐사하려는 노력 없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콘크리트를 바르듯이 제국의 기억을 망각한 것이다.그러나 제국일본은 콘크리트 바닥 아래에서 가만히 잠들지 못했다. “정상국가로 돌아가자”며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평화헌법 개헌 움직임에 대해 과거 식민지들이 크게 반발하는 등 제국과 식민지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제국일본이라는 지층은 요동쳤고, 콘크리트에 균열을 냈다. 악화 일로에 있는 지금의 동아시아 정세가 이를 잘 나타낸다. 이제 과거를 콘크리트로 덮는 일을 멈추고, 제국일본이라는 지층 탐사에 나서자는 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다.
3. 말이 칼이 될 때
혐오사회를 조망하고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혐오의 문화를 변화시킬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연구하고, 젊은 감각으로 한국 사회의 이슈를 다뤄온 저자는 혐오와 차별의 현실에 무감각한, 그래서 별다른 대책조차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혐오표현이 우리 사회의 ‘공존의 조건’을 파괴하고 또한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배경과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곧 혐오표현의 문제에 대응하고 해결할 길을 찾는 건 ‘공존의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통해 ‘혐오’라는 문제적 현상을 인식하고,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의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어떠한 개인적, 사회적 노력을 시도할 수 있는지, 차별금지법부터 대항표현까지 혐오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또한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수치와 혐오심_너사바움
혐오의 양가성과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수치심을 읽는 법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여성혐오 논란이 뜨겁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넥슨 성우 해고 건을 거쳐 정의당 내 메갈리아 논쟁에 이르기까지. 공론장에 거대한 화염을 몰고 온 이 ‘여혐’ 논쟁에서 흥미를 끌었던 것 중 하나는 혐오의 가해 주체로 명명된 이들이 일부 우익청년들을 넘어 ‘진보’와 ‘리버럴’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지지하는 온라인 남성 유저들이라는 점이다. 이 남성들의 반응 중 흥미로운 한가지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었다. “나는 여성을 사랑할 뿐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차(性差)가 아니라 성별 간 공존을 말하고, 본인들의 사랑이 혐오로 번역되는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스스로를 ‘일간베스트저장소’ 유저 등의 우익청년들과 분리해온 이들은 지난여름 일부 ‘중도개혁’적 사이트들을 통해 반(反)메갈리아의 거대한 전선을 형성했다.
‘혐오(嫌惡)’는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을 말한다. 반면, 학문적으로 hate와 disgust는 단순한 미움만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양가적 정서들을 동반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의 이 책은 좁게는 역겨움, 혹은 불결함의 감정을 뜻하고, 맥락에 따라서는 혐오라는 적극적인 감정표현으로 이해 가능한 disgust의 개념을 천착한다. 우선 누스바움의 논의를 참고해, disgust 개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소로 정리해볼 수 있다.
1) 혐오(disgust)는 오염에 대한 불안에 다름 아니며, 주체의 안과 밖 간의 경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촉발된다. 특히 전염의 효과를 갖는 에이즈 등의 일부 질병은 혐오(disgust, 역겨움)의 대상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 질병은 주체의 밖에서부터 (전염을 통해) 주체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따라서 disgust의 감정은 에고(ego)가 형성되는 세살 이전에는 발견하기 힘들며, 동성애 등의 성소수자들처럼 이성애적으로 형성된 ‘문명’의 집단 에고를 내부적으로 흔드는 존재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혐오’는 근본적으로 자아 경계의 동요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이다.
3) 이러한 경계 동요 현상이 근본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문명’이 충분히 억제할 수 없었던 인간 안의 동물성 혹은 동물적 유한성의 지표들이다. 문명은 진보한다고 간주되며, 동물적 유한성과 그 유한성이 상기시키는 ‘유약함’(혹은 추악함)을 넘어 나아가고자 한다. 트림이나 콧물 혹은 기타 인간의 배설물들은 인간에게 ‘수치심’과 ‘역겨움’을 안겨주는 반면, 새로운 민족국가의 경계를 구성해가던 20세기 초 혁명과 전쟁의 흐름들은 주먹을 쥔 강인한 남성 이미지를 통해 ‘국경의 확정’과 함께 문명 재건의 거대한 파토스를 확산시켰다.
4) 남성의 주먹과 근육질로 대표되던 20세기 문명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disgust의 대상은 대체로 ‘점액성’을 갖고 유동적이며 경계가 모호하다고 간주된다. 여성은 남성지배의 틀을 내부로부터 흔드는 존재(‘꽃뱀’ 등)가 되고, 유대인은 독일 민족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존재로 이해된다.
5) 부당함이나 위해 등의 외적 현상에 대한 반응인 분노와 달리 자아의 경계를 균열시키면서 나타나는 disgust에서는 대상이 실재보다 이미지에 의해 압도되고 신비화되는 경향이 강하다. 대상의 신비화는 폭력의 이상화(理想化)를 이끌며, 혐오 대상을 제압하기 위한 문명인(근육질의 남성)의 극단적 폭력을 호출한다.
혐오(disgust, 역겨움)란, 이처럼 집단적 에고의 동요로부터 파생되며, 혐오폭력이란 그 경계 동요로부터 문명의 ‘순수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일종의 ‘근원적 폭력’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미국의 주류 법학 담론에서 disgust는 법리 해석에서도 의미심장한 해석의 준거점을 제공해왔다. 예컨대 동성애 혐오로 인한 살해는 살해 자체가 갖는 위법성에도 이성애 문명 기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문명수호라는 가치판단하에) 일정한 합리성을 가지며, 따라서 형량의 감축을 위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리적 판단의 준거가 되는 것은 그 보통 사람들의 기준이 흔들릴 때 문명 그 자체의 경계가 와해되리라는 불안인데, 이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불안과 연루된 혐오 대상의 위치다.
혐오 대상은 근본적으로 혐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어딘가에 모호하게 걸쳐진 채로 존재한다. 예컨대 누스바움은 인간의 배설물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혐오스러운 것은 이질적인(alien)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신체적 생산물은 신체 내부에 있는 한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신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68면, 번역 수정) 주체의 내부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그것이 과잉되어 (에고를 교란하며) 주체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혐오는 단순히 타인을 ‘과격하게’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초과해 나간 것으로부터 주체의 경계를 재확정하고자 하는 질서확립형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적용된다. 남성지배의 일부일처제에서 ‘여자를 가진 남자’는 문명이 형상화하는 규범적 남성성 모델에 정확히 부합하는 존재다. 그는 열정적으로 여자를 사랑하며 자신의 사랑의 순수성을 확인하기 위해 그 관계를 교란하는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문명의 순수성을 재확립하고 싶었던 역사 속의 수많은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에고를 점액성 물질처럼 넘나드는 여자들의 어떤 ‘과잉성’이다. 지난 5월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여름의 ‘메갈리아’ 논쟁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여성의 이름으로 진행된 어떤 과잉성들에 직면하며 당황한다. 누스바움의 논의에 따를 때, 이 당황은 공포나 분노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운 감정이다. 죄책감이 행위에 대한 반성이라면, 수치심은 에고의 총체성이 손상된 데 대한 반응이다. 에고를 완결적인 것으로 통합시켜 주어야 할 대상이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청년 남성들은 격렬한 반메갈리아 전선을 통해 이 수치심의 무기력한 정념을 회수하고자 한다.
애초에 혐오는 주체의 내부에서 주체를 초과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다. 내부로 들어오지 않은 것을 혐오할 수 없듯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여자를 혐오할 방법은 없다. 인간의 동물적 유한성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혐오와 수치심의 문제를 연역해내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이러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있어 탁월한 영감을 제공한다. 다만, ‘혐오’와 ‘수치심’의 원천을 이해하기 위해 대상관계이론이나 여타의 임상심리학 연구에 준거하는 방식이 혐오의 역사성을 이해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누스바움이 사용하는 ‘문명’의 개념이야말로 모더니티의 산물이며, 1차대전기의 시대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에른스트 윙어(Ernst Junger)의 ‘새로운 남자’(Der neue Mensch, 새로운 인간) 개념이 전쟁과 혁명을 동반한 서구 문명의 질서재구축 과정에 동원된 수사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혐오의 역사성이라는 화두는 이 책의 논의를 연장시키는 별도의 탐구주제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주체의 내부와 연결되어 있되 내부를 초과해 뛰쳐나가버린 무엇. ‘(메갈리아로 표방되는) 여성들의 반란’이 어떤 경계에서 시대의 화두를 분주히 미러링하는 중이다.
정현 / 정치철학 연구자
2016.9.28 ⓒ 창비주간논평
5. 실체적 보편에서 매개적 보편으로-형이상학의 질병과 한국학
이 논문은 한국학에서 이뤄진 이른바 근대성 논쟁을 서양철학사의 보편문제와 연동시켜 독해함으로써 한국학이 지향할 보편문제를 시론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편문제란 12세기에 아라비아를 경유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콜라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제기된 주제이다. 아벨라르는 보편의 보편됨은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사태(status)’라고 답했다. 이후 보편문제란 이 사태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는 철학사의 문제로 남겨져왔으며, 이는 문장 바깥의 어떤 존재로 불안에 떠는 형이상학적 질병으로 잔존한다. 이 보편문제를 염두에 두고 한국학에서의 근대성 논쟁을 살펴보았다. 우선 근대성 논쟁이란 한국이 과연 근대라는 보편에 귀속될 수 있는지, 귀속된다면 그 경로는 어떠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근대성 논쟁은 근대를 절대적 전제로 가정하여 실체화했고, 이에 대한 비판이 내재적 발전론 비판의 형태로 제기되어 근대성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자는 근대를 실체화함으로써, 후자는 근대를 분해하여 또 다른 집합으로 한국을 귀속시킴으로써 보편의 보편됨이란 문제를 논의에서 지워버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의 내재적 발전론을 보편문제와의 연관속에서 독해했다. 이를 통해 가지무라의 조선학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조선과 일본을 매개함으로써 고정된 보편을 내파하는 매개적 보편임을 제시했다.
이는 12세기에 활약한 아벨라르(Pierre Abélard)의 말이다. 그는 보편의 보편됨을 사태(status)로 정식화한다. 이때 인간의 ‘인간임’이란 ‘사태’는 어떤 사물=존재자가 아니다. 또한 개개의 인간으로 분해될 수 있는 추상화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실체도 개념도 아닌, 기묘한 성질의 존재성 격을 갖는 무언가이다.
즉 개개의 사람을 ‘인간’이라는 명칭으로 묶을 수 있게끔 하는 공통원인은 말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통원인, 다시 말해 보편을 보편이게끔 하는 것을 실체나 이름 으로 환원하는 것은 언제나 불충분한 해답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실체와 유리된 채 부유하는 이름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실체나 이름의 차원과는 다른, 감지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물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편문제는 끝이나 정답이 없는 끊임없는 논쟁이다. 그런 의미에 서 보편문제를 종결시키려는, 최종해답을 내리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반지성적 활동이다.
논리학을 빌린 형이상학 비판이나 형이상학을 휘두르는 논리학에 대한 단죄는 지성의 활동을 저해하는 반계몽적 기도인 셈이다. 보편의 보편됨을 확정적 실체로 환원하는 형이상학이나, 반대로 보편의 보 편됨을 개별자로의 무한한 분해 속에서 언어적 형식으로 해소하는 탈형이 상학 모두, 자신의 기획만이 진실임을 내세우는 한에서는 반-지성의 기도일수밖에 없다. 이를 한국학으로 전유해서 바꾸어 말하자면, 한국학 혹은 한 국을 어떤 확정적 실체로 환원하는 패러다임과 반대로 그런 패러다임을 해 체하여 개별자로의 무한 해부를 기도하는 패러다임 사이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대립이 서로가 유일한 진리임을 내세우는 치킨 게임의 양 상을 보여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도는 한국학을 반-지성으 로 이끌 가능성이 농후한 자폐적 성격을 내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한 국학에서의 논쟁 구도를 보편문제라는 틀 내에서 검토해볼 차례이다.
6. 정체성 정치 ─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까?_정진희
정체성 정치는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 등 차별에 맞선 여러 운동에 서 널리 수용된다. 오늘날에는 ‘정체성 정치’나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흔 히 사용되지만, 이 개념은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에서 여성·성소수 자 운동 등이 부상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물음과 관련 있다. 다시 말해, 정체성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을 자각하는 특징이나 자신에게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를 단순하게 다루는 경우가 흔한데, 사람들이 정체성 정치를 여러 의미로 쓴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 는 1960년대나 1970년대 이후 여러 형태로 사용돼 왔지만, 때때로 상 이한 사람들에게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됐다.”(위키피디아) 넓은 의미의 정체성 정치는 특정 정체성에 호소해서 자신을 정당화하 는 정치적 행위를 가리킨다.
진보·좌파 세력만이 아니라 우파도 정체성 정치를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우파들이 인종차별을 정당화 하고자 백인 정체성 운운하는 것이 그 예다. 이때 허구적 관념이 사용 되며(“이주민 때문에 토박이 백인이 위협받는다” 등), 사회에서 천대받는 집단의 정체성을 비난하는 주장이 나타난다(“무슬림 정체성이 사회 통 합을 저해한다” 등). 좁은 의미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집단이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을 기초로 건설하는 운동의 전략이나 조직 방식을 뜻한다.
이 글에서 다루 는 정체성 정치도 이것이다. 정체성 정치를 논할 때는 먼저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와 우 파의 정체성 정치를 구별해야 한다. 차별에 맞서 변화를 위해 특정한 차 별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결집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특정 집단을 배 척하고자 데마고기를 펴는 정체성 정치는 사회적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진보적이지만, 후자는 반동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서구 학계를 지배한 포스트마르 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에 기반을 두었다. 이런 사상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정치·경제·이데올로기 영 역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본다. 현실의 파편성을 강조하며 국지적 저항 만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을 거부하는 것은 차별 문제를 계급 구조 와 분리시키고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정 체성 정치는 차별을 개인적 피해로 여기게 해, 집단적 저항을 호소할 때 조차 시나브로 집단적 조직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개인들의 피해 경험 드러내기를 고무하며 운동의 방향에 대한 이견 제시, 비판 등 정치적 주 장을 펼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피해를 기준으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면, 초점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들 간의 위계나 차별에 맞춰지며 개인들을 성토하는 게 주가 된다. 그런데 차별을 주로 개인 관계에서 찾으면 누가 차별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는지 오해하기 쉽다. 남성 일반이 여성을, 이 성애자 일반이 동성애자를, 백인 일반이 흑인을 지배한다며 노동계급과 사회운동 내에서 적을 찾는 경향이 생긴다. 이런 분위기는 운동의 불필 요한 분열을 초래하며 운동의 파편화를 촉진한다.